1700년 전 로마 소녀들, 비키니 입고 각종 운동 즐겼다

2025-04-11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그해 여름, 일요일이었다. 2인승 피아트를 운전해 시칠리아를 가로질렀다. 카타니아에 있는 숙소를 떠나 아그리젠토에 가야 했다. 그러나 먼저 들를 곳이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아차 아르메리나에 놀라운 유적이 있으니 꼭 가보라고, 거기 있는 모자이크를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 4세기쯤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시대의 저택이다.

저택은 피아차 아르메리나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있다. 4200㎡가 넘는 넓은 공간에 방이 50여 개나 된다.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그 중 동쪽에 있는 네 번째 구역의 작은 방 하나가 스포츠사학자를 매혹한다. 오늘날의 비키니 같은 옷을 입고 운동(또는 유희)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표현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작품 속 여성들을 ‘비키니 소녀들’이라고 부른다.

여성의 사회 활동을 제한한 그리스와 달리 로마 여성들의 사회활동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체육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비키니 소녀들은 이러한 로마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소녀들은 아령과 같은 기구를 들고 에어로빅과 같은 운동을 하거나 공을 주고받기도 한다. 흔히 ‘비치발리볼 비슷한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고대 로마 여성들 목욕탕서 체력 단련

소녀들을 살펴보면 리드미컬한 움직임 속에 일련의 동작이 연속되는 듯하다. 잉글랜드의 월 게임이나 축구와 럭비가 갈라서기 전의 풋볼, 이탈리아에서 지금도 성행하는 칼치오와 비슷할지 모른다. 한 소녀는 큰 원반 또는 공을 던지기 위해 몸을 오른쪽 뒤로 꼬아 힘을 모으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두 소녀는 달려 나가며 가운데 소녀가 던지면 받으려고 준비하는 것 같다. 미식축구의 리시버처럼.

비키니 소녀들은 로마의 여성들이 운동을 즐겼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TV시리즈 ‘스파르타쿠스’에서 보듯 확실히 로마의 여성들은 억척스러운 면이 있었던 듯하다. 여성 검투사도 있었다고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했다. 로마의 목욕탕은 피트니스센터였다. 로버트 메치코프가 쓴 『스포츠와 체육의 역사 철학』(김방출 번역)에 유베날리우스의 증언이 보인다.

“그녀가 목욕탕으로 간 것은 밤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가져갈 기름병과 다른 보급품을 주문한 것도 밤이었다. 그녀는 소란스럽고 야단법석인 곳에서 땀 흘리기를 좋아했다. 기구 운동으로 피로해진 그녀의 팔이 옆으로 늘어졌을 때, 능숙한 안마사는 그녀의 몸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그녀의 몸에서 찰싹대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로마 문명의 교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에서 여성들은 어느 정도 스포츠를 즐기며 살았을까? 먼저 신화시대로 가보자. 신화는 역사 이전의 그리스로 안내하는 네비게이터다. 호메로스가 남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화의 세계를 여행하려는 우리에게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의 손에 쥐어준 실타래와 같다. 저 시간과 공간의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게 해준다.

『일리아스』는 10년이나 계속된 트로이 전쟁 기간 중 51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묘사한다. 신화 전체에 비하면 순간처럼 짧은 시간의 사건 기록이다. 호메로스는 웅혼한 노래로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가장 뛰어난 장수이며 그리스 신화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영웅 아킬레우스. 그는 어찌하여 분노로써 『일리아스』의 문을 여는가.

그리스 연합군의 진영에 역병이 돈다.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회의를 소집한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포로로 붙잡은 크리세이스를 아비에게 돌려주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세이스는 아폴론 신전의 사제 크리세스의 딸이다. 아가멤논은 딸을 돌려달라는 크리세스의 간청을 뿌리친다.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복수를 청한다. 역병은 신의 응답이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줄 테니 다른 여자를 내놓으라고 뻗댄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보내야 했다.

호메로스는 브리세이스를 ‘큰 키에 기품이 넘치는 여성으로 금발이 치렁하고 눈이 크며 피부는 새하얗고 볼이 곱다’고 표현했다. 아킬레우스는 싸우기를 거부한다. 그리스군은 연전연패. 아가멤논은 당황한다. 브리세이스를 돌려보내며 그녀와 자지 않았다고 맹세한다. 자기 딸 중 누구든 고르기만 하면 아내로 주겠다며.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풀리지 않는다.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다가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작가 박신영은 말한다. “브리세이스도 약탈당하여 성노예가 된 여성”이라고, “일리아스 어디를 봐도 성노예를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만 나와 있을 뿐, 성노예가 된 브리세이스의 분노는 없다”고. 그는 썼다. “성노예 역할은 기본이었다. 남성들은 전시에도 여성들의 돌봄 노동을 필요로 했다. 성노예 여성들은 군인들의 막사를 청소하고 물 긷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했다. 군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빨래를 하고 옷을 기웠다. 말을 씻기고 먹이고 똥을 치웠다.”

그리스 신화에는 극단적인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잠복했다. 여성은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 인간들에게 주는 상품, 싸움에서 이긴 자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나마 값싼 재물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다음 파트로클로스를 장사지내고 뒤풀이로 운동대회를 연다. 상품도 내걸었는데 무쇠 솥은 소 12마리, 수공예에 능한 여인은 4마리 값이다.

역사시대로 넘어오면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다. 스파르타의 관리 리쿠르고스는 여성의 본분은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믿었다. 강한 아이들은 강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므로 여성들도 남자들처럼 몸을 단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훗날 히틀러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처녀들이 달리기 경주 뿐만 아니라 레슬링과 원반던지기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남장 관람 막으려 알몸 참가 법 만들어

여자들이 올림픽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파우사니아스는 그리스 여성들이 남성들의 올림픽이 끝난 뒤 헤라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피아에서 헤란 경기를 했다고 기록했다. 중요한 종목은 처녀들의 달리기 경주였다. 처녀 선수들은 가장 어린 처녀, 약간 나이든 처녀, 가장 나이든 처녀 등 세 조로 나뉘어 차례로 경기했다.

헤란 경기는 돼지를 제물로 바쳐 정결의식을 한 뒤에 일정을 시작했다. 정결의식은 올림피아와 엘리스 사이에 있는 피에라 샘(泉)에서 했다. 우승자들은 올리브관을 상으로 받았으며 부상으로 헤라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의 일부분을 받았다. 그들은 헤라 신전에 자신들의 조각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주디스 스와들링의 연구에 따르면 우승한 여성들은 자신의 승리를 묘사한 그림을 더 선호했다.

엘리스 지역에 살던 엘리아인들은 헤란 대회의 운영자 역할을 했다. 그들은 올림피아에 흰 대리석 제단을 쌓았다. 엘리아인들은 처녀들의 경기 관람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은 엄격히 제한했다. 왜 결혼한 여성들을 차별했는지 설명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허가 받지 않은 여성이 올림픽 경기를 보다가 걸리면 사형에 처했다. 이 불운한 여성들은 절벽 위에서 아래로 내동댕이쳐져 죽었다.

아들의 경기를 보려고 몰래 경기장에 숨어들어간 여성의 기록이 있다. 이 여성은 남자 트레이너 차림으로 울타리를 뛰어넘다가 발각됐다. 그녀는 체포되었지만 로도스의 전설적인 운동선수 디아고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면했다. 그녀의 형제와 아들이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사실도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일을 계기로 트레이너 등 지도자들도 선수들처럼 알몸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여성들이 변장을 하고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스파르타의 경쟁국인 아테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국가에서는 여성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다. 여성이 스포츠 경기에 참여하거나 체육 교육을 받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기독교 시대가 도래할 무렵 소녀들을 위한 단거리 달리기 경기가 열렸다. 피티아, 이스트미아, 네메아 제전에서였다. 현대의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해당하는, 당시로서는 문명세계를 뜻하는 그리스 전체의 축전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여성 스포츠는 근대 이후에야 싹을 틔운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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