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순도 명인 ‘정월 장 담그기 행사’ 가보니
지난 18일 전남 담양군 기순도 장고에서 사단법인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주최로 ‘정월 장 담그기 & 포럼’이 열렸다. 지난해 12월 3일(파라과이 현지시간) 우리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로써 한국은 2013년 ‘김장 문화’에 이어 두 번째로 ‘장 담그기 문화’를 인류가 보존해야 할 음식 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식의 가치를 세계에 알렸다.
‘장 담그기 문화’ 작년 유네스코 등재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제35호)은 76세 고령에도 3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양진재 종가의 씨간장을 직접 들고 파라과이 행사에 참석했었다. 기 명인의 간장은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 사용됐는데,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온 360여년 된 씨간장을 사용해 구운 한우갈비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외신은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특별한 간장”이라고 소개했다.
장고(醬庫)는 장을 저장하는 장소로 민간의 장독대를 말한다. 기순도 장고에는 1200여개 옹기 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매년 정월이면 지난해 쓰고 빈 항아리 수백 개를 채우기 위해 새로 장을 담근다. 전년도 음력 10월 말일 경, 즉 동짓달에 메주를 쑤고, 이를 따뜻한 발효실에 한 달 간 걸어두었다가 이듬해 음력 정월 말일에 장을 담근다. 말일이란 12지의 제7위인 오일(午日)을 가리키는 날로, 길일(손 없는 날)이라 이날 장을 담그면 부정을 타지 않아 장맛이 좋다고 한다. 기 명인은 정월 내내 말일마다 장을 담그는데, 18일은 정월 두 번째 말일이었다.
행사 1부에선 이날 참석한 손님들과 함께 장 담그기 체험이 있었다. 옹기 항아리에 메주를 서로 어긋나게 차곡차곡 쌓은 다음 소금물을 붓는 체험이다. 이때 기순도 명인은 집안에서 직접 구운 죽염을 하루 전날 풀어 적당한 농도로 만든 죽염수를 넣는다. “지방마다, 집안마다 염도 맞추기가 다 달라요. 50년 넘게 장을 담갔어도 늘 자신이 없는 부분이죠. 장을 담그는 과정이 10가지라면 그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안 돼서 옛날 조상님들이 하신 대로 날을 받아 목욕재계 하고 철륭제(터주신·장독대신에게 제를 지내는 행사)를 지낸 후 장을 담죠.”

메주와 죽염수를 채운 항아리에 붉은 고추와 대추, 숯을 홀수로 띄운 다음 얇은 대나무 여러 개를 돔 모양으로 엮어 뚜껑처럼 덮는다. 메주가 죽염수 밖으로 올라오면 곰팡이가 끼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얇은 망을 씌우고 항아리 뚜껑을 덮은 다음, 붉은 고추와 숯을 끼운 왼새끼(왼쪽으로 꼰 새끼줄)로 금줄을 만들어 감고, 버선본(버선을 만들 때 사용하는 흰 종이 본)을 항아리 배 부분에 거꾸로 붙이면 끝이다. 이렇게 담근 장은 50~60일 후 간장과 된장으로 갈라 따로 항아리에 보관하면서 숙성시킨다.
기 명인은 이날 손님들에게 간장·된장으로만 간을 한 비건 밥상도 대접했다. 젓갈이나 멸치 육수, 고기를 일체 쓰지 않고 만든 밥상인데 표고버섯볶음, 김부각, 미나리무침, 장김치, 죽순무침 등 열 가지가 넘는 반찬은 식재료 고유의 맛과 함께 저마다의 감칠맛으로 모두에게 호평 받았다. 특히 청국장 콩을 고춧가루·참기름·조청으로 무친 청국장무침은 상추쌈 위에 올려 먹거나 밥에 비벼 먹기에 좋아 인기였다. 기 명인은 “외국인 셰프들이 방문할 때도 내놓는 반찬인데 모두 일본의 낫토보다 맛있다며 좋아한다”고 했다.
“요즘은 한식 셰프들이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고, 식당에선 숙성시키지 않은 시판간장을 주로 쓴다고 하죠. 간장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그래요. 간장은 색깔별로 맛이 다 달라요. 맑은 것은 청장, 그 다음은 중간장, 색이 진한 것은 진장인데 식재료마다, 음식마다 다르게 사용하면 간이 맛있게 딱 맞죠.” 청장은 장을 담근 후 50~60일이 지나 된장과 가른 햇간장이고, 이것을 1년 정도 숙성시킨 것이 중간장이다. 진장은 된장과 가르지 않고 1년 이상 두었다가 가운데 용수를 박아 맑은 간장만 떠낸 후 다른 항아리에 담고 씨간장을 조금 섞어 5년 이상 숙성시킨 것이다.
외신 “360년 된 씨간장, 미국 역사보다 길어”

“소금으로만 간을 해야 식재료의 맛을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아이고, 그건 모르는 말이에요. 옛날에 ‘그 집 가서 장맛을 보면 음식 맛을 알 수 있다’고 했죠. ‘얼마나 가난하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고 사냐’는 말도 있어요. 음식 맛을 제대로 내려면 간장을 사용해야 하는데, 간장을 만들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니까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는 뜻이죠.(웃음) 그만큼 우리 장은 한식의 기본이에요. 엊그제도 파리의 유명 셰프들이 작년에 담근 장을 찾아가면서 얼마나 좋아하던지. 다들 ‘콩, 죽염, 물, 그리고 시간과 정성만으로 어떻게 이렇게 복합적인 감칠맛이 나냐’고 놀라워했죠. 전라도 말로 ‘개미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복합적인 깊은 맛이 나서 아주 맛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말해줬죠. 우리 간장에는 개미가 있다고.(웃음)”
이날 행사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찰음식의 대가 정관스님과 아시아 베스트 여성 셰프로 선정된 조희숙 셰프가 함께했다. 정관 스님은 “전 세계인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장을 배우려고 하는데, 정작 우리가 우리 문화에 관심이 없다”며 “부모가 한 끼라도 전통장을 아이들에게 먹임으로써 건강하고 행복한 밥상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숙 셰프는 “현장에서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어떡하면 우리의 장문화를 지속가능하게 할까 고민이 많다”면서 “결국 젊은이들이 장을 사용한 음식과 집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날 2부 행사에선 고대희 전남도 문화재위원의 진행으로 포럼이 열렸다. 조미숙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해숙 남도학 연구소장이 장 담그기 역사의 배경과 장 담그기 풍속에 대해 발표했고 이윤화 ㈜다이어리알 대표와 문정훈 서울대학교 교수가 트렌드와 빅데이터에 기반한 현대 전통장과 음식에 관련된 내용을 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