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려인마을 ‘한글문학 기획전’, 잊혀진 무대 불꽃 ‘고려극장’

2025-04-07

[전남인터넷신문]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진행 중인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은 고려인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상징적 공간, ‘고려극장’의 역사와 정신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8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고려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었다. 1932년 9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단된 이 극장은 전 세계 한민족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말 전문 연극극장으로,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민족의 언어와 정체성을 지켜낸 문화적 요새였다.

고려극장의 기원은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의 자생적 예술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고려인들은 학교와 직장에서 자발적으로 악단과 극단을 조직하며 문화 활동을 이어갔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구락부에서는 매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과 함께 단막극, 가무 공연 등이 펼쳐지며 민족적 자각을 일깨웠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조직화되어 고려극장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고려극장 창단의 주축은 신한촌 구락부 연예부와 조선중학 학생연예부 출신들이었다. 창단 초기에는 ‘원동 고려극단’, ‘조선극단’, ‘조선극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였다. 우리말과 민족 정서를 무대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사명감이었다.

1935년부터는 춘향전, 장한몽, 심청전 등의 고전 작품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며 고려극장은 명실상부한 전문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35년 9월 춘향전 공연은 판소리와 창극, 양반의 몸짓을 익힌 연해주 태생의 고려인 배우들이 전통 고전을 예술로 승화시킨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된다.

이들 배우는 극장을 통해 우리말과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했고, 연극 속 대사는 고려인 사회 전반에 세련되고 풍부한 우리말 구어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감동을 받은 관객들이 고전을 찾아 읽고 외우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고려극장 역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척박한 초원에서 고려극장은 극장의 기능을 넘어, 숨통이 끊어진 고려사범대학의 교육적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결국 고려일보와 함께 고려극장은 고려인 사회의 언어와 정체성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고려극장은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희곡을 연극으로 구현하며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이와 같은 꾸준한 활동은 고려인 한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했다. 모국어와 민족 얼을 지키고자 했던 극장 단원들과 고려일보 기자들의 노력은 중앙아시아 대지에 고려인 문학과 문화를 꽃피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고려극장의 역사는 단지 연극의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망명과 이주의 격랑 속에서 민족의 언어와 혼을 지켜낸 문화적 항전이자, 고려인 공동체 자존심 그 자체였다.

이러한 고려극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광주 고려인마을의 이번 기획전은 단절된 뿌리를 다시 잇고, 잊혀졌던 역사와 감동을 오늘의 무대로 되살리는 뜻깊은 현장이 되고 있다.

고려방송: 안엘레나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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