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부인과 직원이 쓰던 푸젠 방언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헝화(興化) 방언을 쓰는 사람은 이포에 몇 안 되었다. 다행히 그들은 표준어도 썼다. 룸메이트는 내게 헝화 말 몇 가지를 가르쳐주고, 호끼엔과 푸초우 방언의 중간쯤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양쪽 방언과 너무 달라서 어느 쪽에서도 헝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룸메이트를 통해 알게 된 특이한 사업 분야 하나에 두고두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말라야에서 헝화 사람들은 자전거 관계 일을 많이 한다고 했다.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오래도록 그 분야에 집중해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면서도, 그 분야에서 단연 최고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얘기였다. 오랜 후에도 헝화 사람과 마주칠 때 자전거 얘기를 꺼내 보면 누구나 그 분야와 무슨 관계가 있었다. 직접 관계된 경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분야에 관해 아는 것이 꽤 많았다. 그래서 나중에 말라야의 자전거산업에 관한 연구에서 헝화 사람들의 지배적 역할에 관한 결론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헝화 사람은 그 일만 하는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헝화 출신의 은행가나 학자-외교관이나 잘 나가는 연극감독과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가장 큰 놀라움은 말라야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친펭(陳平) 이야기였다. 이웃 도시인 혹챠(福清) 출신으로 호적이 되어 있으나 사실은 헝화 출신이라고 했다. 그 집에 머물며 중국인의 복잡한 정체성에 관한 입문 수업을 받은 셈이다. 이 주제는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중국인의 정체성에 끝없는 의문을 일으켜주게 된다.
예 씨 집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수십 년 후 이포에 갔을 때 그 집 아들 예린성(葉林生)을 만나고 최근의 말레이시아 정치 변화에 관한 그의 책 〈중국인의 딜레마 The Chinese Dilemma〉(2005)를 알게 되었다. 그 집안이 말레이시아에 얼마나 잘 정착했는지, 그 나라가 평화 속의 발전을 이루는 과정을 분석하는 능력을 저자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인지 그 책을 읽으며 알아볼 수 있었다. 국가적 과제의 변화에 중국계 국민이 적응하는 과정에 대한 그의 통찰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성공을 위한 조건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학교 친구 프랜시스 리가 그 집 건너편에 살았고 1년 동안 자주 보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린타운의 외진 곳에서 살 때는 누리지 못하던 조건이었다. 시내 사는 급우들과 이렇게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프랜시스 집은 학까계로, 중국인 중학교를 지원하는 광산업자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가 프랜시스 아버지와 아는 사이여서 두 집이 가깝게 지냈다.
프랜시스와 함께 한 일 한 가지를 잊을 수 없다. 동해안에서 잡은 생선이 들어오는 날 시장에 가는 일이었다. 동트기 전부터 긴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그래도 함께 함으로써 고역 아닌 즐거운 외출이 되었고, 농수산시장을 누비며 원하는 종류의 생선을 찾아내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프랜시스 집에서 집안 행사에 나를 반갑게 끼워준 일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 그 어머니는 예쁜 분이었는데, 언어의 불편을 무릅쓰고 우리 어머니와 소통할 수 있었다. 내가 프랜시스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불러주셨다. 나도 차츰 학까말을 익히고 그 집 친척과 친구들도 어울리면서 학까 사회 준회원쯤 되는 기분이었다. 그 집의 따뜻한 분위기 덕분에 이포의 중국인사회에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이방인 의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942년을 적응의 고비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편안한 닫힌 공간에서 쫓겨나 낯설고 열린 장바닥에 내쳐진 기분이었다. 영어가 아니라 온갖 중국어 방언과 아주 약간의 표준어를 쓰는 중국인들 틈에서 처음으로 살게 되었다. 그린타운의 생활이 장사꾼과 일꾼들이 어울리는 진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보호막 속에 있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일본군 점령 전에 내가 접촉해 본 구시가는 잠깐 다닌 보충학교, 아버지가 이따금 데려가신 서점, 그리고 1년에 몇 차례 가던 영화관 정도였다. 이제 우리는 시내 사람들에게 “불쌍한 친척”이 되어 그들의 호의와 도움 속에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아발견과 함께 새로운 종류의 재미를 찾아낸 시절이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은 가게에 매달려 가게 안에서 사는 사람들, 낮은 임금에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 저녁때 운동장에서, 또는 아침결에 강가에서 만나 같이 노는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 학교에 다녀본 일이 전혀 없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학교에 다니지 않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 깨닫게 되었다. 중국인이면서도 위대한 고전문헌에 그려진 ‘중국다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여러 종류 복합성과 함께 그린타운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계층과 서열의 존재에 눈뜨게 되었다. 또한 부모님이 내게 만나도록 해주시려는 ‘중국’의 의미에 대한 의문도 일어났다. 내게 고전을 공부시키려는 아버지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어머니는 점령기 내내 궁극적 귀국에 관한 말씀이 없게 된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 선생 가족과 헤어져 구시가에서 살게 된 후 아버지는 그곳에서 조그만 일거리를 이것저것 찾았고 어머니는 부엌일과 살림을 하셨다. 약간의 저축이 있었고, 필요없는 물건들을 팔아 돈을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절박한 지경에 빠진 적은 없었다. 밍테 학교에 다니는 몇 달 동안 채소와 쌀을 사러 농수산물시장에 몇 차례 간 일이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공부방에서만 공부할 때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아직 열려있는 점포들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우리 가족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지 나는 대단히 궁금했다.
자기네 가게에서 어떤 장사를 하는지 사람들 설명을 들으며 내 광둥어가 늘었다. 가게에서 파는 음식과 식재료, 의류와 생활용품 중에는 자기네가 조리하고 키우고 만든 것이 많았다. 중국인 가게마다 향을 계속 피우는 제단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신들의 보호를 받아 사업이 번창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고향마을에서 모셔 온 신들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어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렵에는 우리 가족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 왔기 때문인지 물어봤다. 우리 고향 사람들도 신을 모시는데, 우리 집이 유가 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설명하셨다.
가장 흥미로운 곳은 이런저런 기계를 수리하거나 가구나 냄비, 솥 등 주방기구를 만드는 가게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온갖 기술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도구도 몇 가지 안 되고 거의 손재주만으로 고치거나 만드는 물건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 급료가 얼마나 적은지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나 형님들 밑에 일하며 아무 급료도 받지 않는 내 또래 아이들도 많았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었고, 다녀본 적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집에서 딸아이를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만난 중국인 중에는 건너온 지 수십 년이 되고, 언젠가 중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척 방문 기회라도 바란다고들 했다. 내가 상하이에 가본 이야기를 하면 놀라워했다. 그들은 간다 해도 광둥이나 푸젠이 고작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비록 방언이 다르고 그들의 종교나 결사와 거리가 있다고는 해도, 우리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를 보통사람들 생활에서 격리시킨 것은 그린타운이라는 조건, 이주민사회의 관리들을 일반대중의 위에서 살게 한 제도적 조건이었다.
1942년의 한 주일 한 주일이 지나가면서 일본인이 스스로 사라져줄 전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도 어떻게 하면 매일 만나는 중국사람들과 더 가깝게 될 수 있을까 생각이 시작되었다. 부모님과 그 친구들은 지금 겪는 상황이 일시적인 것이고 영국인과 연합국들이 전쟁을 이길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희망이었다.
우리는 시내의 일본 병사들이 무서워서 그들이 지키는 곳들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다행히 일본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일본군이 인도에서 영국인을 쫓아내러 가는 길에 버마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추측하던 생각이 난다. 남아있는 일본군은 대개 조선인이나 타이완인이었다. 말썽을 일으킬 마음이 없는 중국인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양해가 있고, 영국에 충성심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의심의 표적이 되는 것 같았다. 어찌됐든 식량과 도구 등 필수품 생산을 위해 일본인들은 중국인을 필요로 했다.
길에는 영어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내 생활에서 영어로 표현되는 부분이 몽땅 잘려져 나간 것 같았다. 그 시점에서 생각지 못한 운명의 장난이 내 영어 공부의 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일이지만 전쟁 후 앤더슨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된 기회였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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