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의 원인, 피해자의 삶…슬픈 노래처럼 직조되기까지

2025-03-11

피아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피아노의 현이 있어야 할 자리엔 찬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면실이, 건반이 있어야 할 자리엔 그 실들로 짜인 천 조각이 있다. 그랜드피아노 모양의 방직기의 뚜껑의 문구의 울림이 크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서울 종로구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지난 6일부터 열리는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에 전시된 권은비 작가의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사회적 문제를 예술로 비판해 온 권 작가는 한 참사 분향소 철거를 돕다가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음률 같이 들려 피아노 모양의 방직기를 만들었다. 방직기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자본주의가 빚은 참사의 발생 과정, 참사에 얽힌 사람들의 생애가 서로 얽혀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올해 첫 전시인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는 사회적 재난 피해자를 비롯한 소수자 운동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한 아카이브 전시다. 공공에서 포착하지 못한, 혹은 의도적으로 포착하지 않은 주제들이 주된 전시의 대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475)의 경구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에서 착안해 기록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전시 제목에 담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올해 기관 의제로 정한 ‘행동’을 아카이브 전시로 구현해냈다고 설명했다. 전시를 기획한 유예동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동시대 미술이 기록에 다양한 맥락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여러 기록 자료들과 함께 작가 7명·1팀의 영상, 사진, 설치 작품 등이 함께 전시돼 있다. ‘이태원은 무엇일까 기록하기 프로젝트’의 줄임말인 ‘이무기 프로젝트’는 미술가·사진가·연구가 집단으로, 한쪽 벽면에 한국의 근대사와 그에 따른 트랜스젠더·동성애자 관련 사건을 도표로 시각화해 ‘트랜스-젠더-시간-제도’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이무기 프로젝트는 지난해부터 이태원 트랜스젠더-성 노동자 커뮤니티의 역사를 기록해오고 있다.

일본 작가 다카하시 켄타로는 몇 년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첫 증언자를 만나 그가 살았던 장소, 봤던 풍경, 그를 돕거나 그의 삶을 기록한 인물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렇게 만든 작품 ‘곁에 머문 부재’ 중 몇 사진에는 프레임 안에 자신의 손을 노출해 함께 하고 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4·3평화재단, 비영리 공공 아카이브인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등도 협업기관으로 참여했다. 제주 4·3사건, 민주화운동과 그 피해 유가족, 성소수자들의 활동 내역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4·3사건의 진상을 다룬 제주 지역 언론의 기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이 민주화운동 전후에 진행한 가족 운동 관련 문건 및 사진 자료, 1990년대 초기 성소수자 운동 관련 기록물이 전시됐다.

어떤 재난 피해자들은 증언으로 함께 한다. 지난 8일부터는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와 연계된 구술 직조 퍼포먼스도 진행 중이다. 청계피복노조 활동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 지난해 벌어진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작가와 차례로 대화하는 장이 마련된다. 이들의 목소리는 권 작가의 작품에도 반영된다고 한다. 전시는 오는 7월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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