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내면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오페라

2024-10-10

드디어 긴 무더위가 지나가고 서늘한 가을을 맞았다. 공연을 관람하기에 딱 좋은 이 계절, 2024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10월 3일부터 27일까지 열리고 있다. 올해로 24회를 맞이하였다고 하니 그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16개의 공연으로 구성되고 또 창작랩과 워크숍까지 열리고 있어 규모도 크다. 음악, 무용, 연극과 같이 실제 무대에서 행해지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공연예술은 현장에서 생생하게 예술성을 경험할 수 있다. 장르의 벽을 넘나드는 다양한 공연이 집중적으로 열리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공연예술의 현장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서사’ 키워드 올해 SPAF

이집트 여성 작가 사다위 작품

멀티미디어 오페라로 재해석

여성의 고통·부조리를 예술로

다채로운 공연 가운데 LOD 뮤직시어터의 ‘우먼, 포인트 제로’(10월 4~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사진) 공연을 관람했다. “가부장적 사회 체계에 도전하는 두 여성의 해방과 저항의 목소리, 새로운 형식의 멀티미디어 오페라”라는 소개 글을 읽으며, 공연 시작 전부터 궁금증과 기대감이 커졌다. 오페라의 주제와 형식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깜깜한 무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무대 중앙의 큰 영상에는 이집트의 여성들이 비추어졌고, 연주자들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인공 파르마와 그녀를 취재하는 영화 제작자 사마가 등장하여, 노래와 연기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낯설고 이국적인 음향이 무대를 가득 메웠다.

오페라는 살인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파르마가 사마에게 자신의 삶의 여정을 쭉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 작가 나왈 엘 사다위(N El Saadawi, 1931~2021)의 소설(‘Woman at Point Zero’)을 토대로 한 것이다. 가정폭력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배움의 길을 걷지 못한 파르마는 아버지의 죽음 후 겨우 학교 교육을 받게 되지만, 17살의 그녀는 60살의 남편을 맞게 되었고, 결혼 후에도 폭력과 억압에 시달린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로 나온 그녀는 매춘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괴롭힌 한 남자를 죽여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험난한 삶의 여정은 레바논 출신의 작곡가 부시라 엘-투르크(B El-Turk)와 이집트의 연출가 라일라 솔리만(L Soliman)에 의해 강렬한 음악으로 구현되었다. 주인공 파르마는 독백과 아리아로, 때로는 절규하며 자신의 감정을 뜨겁게 드러냈고, 파르마를 촬영하며 질문을 던지는 사마는 연극적인 대사와 레치타티보 그리고 노래로 그녀에 응답하였다. 이들의 노래는 격렬하기도 했지만, 처량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영상은 오페라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집트 여성의 모습뿐 아니라 파르마를 실시간으로 촬영하여 그 영상을 바로 무대에 띄우면서 현실과 가상을 중첩시켜 극적 효과를 증대시켰다.

다이내믹한 표현력은 라이브 음악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앙상블 ZAR의 단원들은 이란, 이라크 등지에서 사용되는 7현 악기 카만차, 아르메니아의 전통 관악기 두둑, 한국의 대금, 일본의 쇼 그리고 아코디언, 리코더, 크롬호른, 첼로 등의 서양악기를 호소력 있게 연주하며 독특한 음악적 색채감을 더하였다. 여기에 전자 음향이 적재적소에 활용되었다. 더불어 연주자들은 악기 연주뿐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극의 흐름에 동참했고, 무대의 한편에서 열정적으로 지휘한 지휘자 역시 자신의 몸을 두드리거나 춤을 추거나 목소리를 냈다. 몸이 일종의 악기가 된 셈이다.

먼 이집트의 여성 이야기이고, 음악도 이국적이었지만, ‘우먼, 포인트 제로’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파르마는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삶의 고통과 부조리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예술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삭막하고 소외된 것’을 미메시스(모방 혹은 재현)하며, 이를 통해 사회의 안티테제가 된다는 아도르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격렬한 오페라를 감상하며 떠오른 작품이 있는데, 바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곡가 박영희(1945~ )의 ‘여인이여, 왜 우는가’이다. 11월 1일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될 이 작품은 절박함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 특히 여성을 생각하며 쓴 장중한 관현악곡으로, 박영희는 눈물 흘리는 여성에게 위로를 건네주며 삶과 존재에 대한 소망을 이끌어주고 싶다고 하였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격렬하게, 때로는 은유적으로 고요하게 음악은 사회와 마주하며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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