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배송과 취업 빙하기

2025-11-06

일본엔 취업빙하기(就職氷河期) 세대가 있다. 버블이 종식되고, 소위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될 시기에 사회로 나온 이들이다. 취업빙하기 세대는 직전 세대보다 취업률이 떨어지는 건 물론 평균 소득이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일본 내에서도 버림받은 세대로 통한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처지가 된 건 일본 특유의 고용경직성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정규직에게 반쯤 종신고용을 보장했다. 그래서 버블 이후의 불황을 해고가 아닌 신규 채용 축소로 견뎠다. 사실상 사회초년생들이 윗세대 대신 희생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보단 상황이 나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 역시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나, 정리해고를 법제화하고, 파견과 하청의 형태로나마 고용 부담을 완화해주는 노동법 개혁을 진행한 덕에 한 세대가 통째로 버려지는 대신 비정규직이라는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점차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비정규직마저도 청년층에겐 쉽지 않은 일이 됐다. 근래 교육 중인 게 아닌데도 구직을 단념한 ‘쉬었음’ 청년이 부쩍 는 이유다. 과거 일본에서 버림받은 세대가 경험한 니트(NEET)족이 우리에게도 시차를 두고 재현되는 것이다.

심각한 일자리 급감을 책임지는 게 유통 기업 쿠팡이다. 한국 CXO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직원이 많은 곳은 약 28만여 명이 재직 중인 삼성그룹이다. 다음이 현대차그룹(약 20만명), LG그룹(약 15만명), SK그룹(약 11만명) 순인데 다섯 번째가 바로 쿠팡(약 10만명)이다. 고도의 숙련이나 교육을 쌓지 않아도, 몸으로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귀한 자리다. 예전엔 그런 일자리가 대기업 공장에서 나왔으나, 이젠 그 역할을 쿠팡이 한다.

이런 쿠팡을 두고 근래 민주노총은 새벽 배송을 금지하자는 정책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의 근로 여건 개선을 빌미로 민주노총을 탈퇴한 쿠팡 노조에 압박을 가하는 거란 해석까지 나올 정도로 황당한 주장이다. 노동 요건이 그리 나쁜데도, 왜 청년들이 쿠팡 새벽배송 일자리에 몰리는지를 고민이라도 해봤을까. 탈성장 시대엔 양질의 일자리가 너무 줄어들어, 쿠팡 일자리 정도면 주변부 노동에서 사실상 수요독점(monopsony)을 행사할 정도다. 그런데 새벽배송 자리마저 규제해버리면, 청년층이 고강도·고소득 일자리를 잡기는 정말 하늘의 별 따기가 된다.

물론 일자리를 잡은 소수는 상대적으로 안락한 근로환경을 얻을 것이다. 윗세대들이 그랬듯, 소득도 나쁘지 않게 얻을 테다. 그렇지만 안락한 일자리를 잡지 못해, 재차 쿠팡에서도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상황을 아는 쿠팡 노조는 압도적으로 새벽배송 존치를 요청했다. 제발 당사자보다 이념이 앞서가진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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