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몸이 기억하는 삶

2024-09-26

빗속의 살인이다. 주저함 없고 거침없는 손놀림에 상대는 고꾸라진다. 잔인하고 비정한 킬러가 임무를 끝내고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려 목욕탕에 갔다가 바닥의 비누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 기억상실이 되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다. 또 다른 사람, 삶은 뜻대로 되지 않고 월세마저 밀려 생을 포기하기 직전의 옥탑방 청년은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주인집 여자 말에 몸은 씻고 죽자며 목욕탕으로 간다. 킬러가 넘어지면서 빠져나온 라커룸 키가 청년 앞에 떨어졌다. 탈의실에서 명품시계와 지갑을 보며 부러워했던 그 남자의 열쇠다.

이계벽 감독의 ‘럭키’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와 그를 대신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액션 코미디물이다. 예상대로 킬러에게 구원의 천사가 다가오고 인생 역전한 청년에겐 킬러의 제거 대상인 미모의 여인이 포착된다. 액션과 코미디와 로맨스가 뒤엉키더니 두 개의 인생과 두 개의 사랑을 모두 획득한다는 예상 가능한 결말이다. 여기서 끝일까? 더 이상의 이야기도 쿠키도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이 보인다.

두 개의 공간, 두 개의 삶. 킬러와 청년의 생활태도, 즉 계획적이고 루틴이 명확한 일상과 무질서와 무절제로 점철된 인생의 대조다. 병원에서 깨어난 킬러는(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청년과 뒤바뀐 삶으로 들어간다. 옥탑방을 열면 아수라장에 난장판이다. 거지소굴이 따로 없다. 전날까지 목 매 죽으려한 청년이었다. 주저하지 않고 집을 청소한다.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마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다. 최고의 킬러다운 몸놀림이고 자세가 여전하다. 반면 졸지에 명품시계와 명품 차와 럭셔리한 아파트까지 접수한 청년은 제 버릇을 남 못준다. 게으르고 나태한 생활습관은 모델하우스 같은 주거공간을 하루 만에 돼지소굴로 바꿔버린다. 폭음과 폭식과 빈둥거림이 일과이고 남의 집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도덕적 고민이나 죄책감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단 하루 만이라도 폼 나게 살고 죽자”는 게 그의 인생관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옥탑을 전혀 다른 환경으로 변모시킨 킬러는 일자리를 얻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낸다. 어디서 무엇을 해도 인정받고 칭찬 일색이다. 청년의 삶은 완벽하게 풍요로운 환경에서도 옥탑방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성공의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어떤 악조건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수행하지만, 실패에 찌든 이들에게서 보이는 건 근거 없는 패배주의와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한 생활 태도다. 사소한 생활습관이 일상을 만들고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엄연한 진리.

영화 엑스트라로 시작해 주연 급으로 반등하면서 여배우와의 키스 신을 앞두고 걱정하는 킬러에게 (그를 구조한 119대원) 리나는 말한다. “그건 몸이 기억하는 거잖아요.” 집을 깨끗이 치우고 일터에서 칼로 멋진 조각을 완성하면서 자기 재능을 발휘하는 그에게서 폭력의 역사마저 지우는 몸의 기억을 본다. 미국의 해군 제독이 말했다지. 성공하고 싶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담요부터 가지런히 개어놓으라고. 어떤 사람의 오늘은 그가 살아온 과거가 켜켜이 쌓인 결과, 라는 말을 이보다 무섭게 증명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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