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에서 다루는 질환들의 증상은 인지·정서·행동 등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 영역에 걸쳐 있다. 그중 치매는 기억력을 비롯한 인지 기능의 저하가 주된 증상이고, 대표적인 기분 장애인 우울증의 경우 우울한 기분, 무기력, 죄책감 등이 주요 증상이다.
치매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주원인인 알츠하이머병은 뇌에 병리 물질이 쌓이면서 퇴행성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퇴행성 변화는 초기에 경미한 기억력 저하로 시작, 서서히 진행해 나중에는 본인의 자서전적인 기억력도 사라지고, 판단력 저하가 동반돼 일상생활의 독립적인 영위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치매 경과가 의심되는 환자들은 조기에 발견하고 원인 질환을 감별해 적절한 예방·치료 조치를 해야 진행을 늦출 수 있다.
한편 노년기 기분·불안 장애는 기존에는 치매처럼 두드러진 퇴행성 경과를 보이지 않는다고 알려져왔다. 따라서 증상에 맞는 항우울, 항정신병 등 약물을 사용하고 상담 치료를 시행하면 젊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회복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2008년 아르헨티나의 정신과 의사 타라가노는 치매로 평가할 정도의 인지 기능 저하가 없는 노인들에서 생애 처음으로 정신행동 증상이 발생할 경우 향후 치매로 진행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경도행동장애’라고 명명했다. 이는 치매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인지 저하가 있을 때를 경도인지장애라고 칭하는 것에서 연유했다.
이후 2016년 미국치매협회에선 경도행동장애 진단 기준을 새롭게 정립했다. 첫째, 50세 이후 발생한 뚜렷한 행동 및 성격 변화가 관찰될 것. 둘째, 이러한 변화는 적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될 것. 셋째, 이러한 변화는 의욕 감소, 감정 조절의 어려움, 충동 조절의 어려움, 사회적인 부적절함, 환각과 같은 지각 이상 또는 망상 중 하나 이상을 포함할 것. 넷째, 이러한 증상으로 사회 및 직업 활동과 대인관계에서 장애가 초래될 것. 다섯째, 치매로 진단할 정도의 인지 저하가 없을 것이다.
실제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노인 환자들이 뚜렷한 인지 저하 없이 우울, 불안, 정신증 등의 증상으로 내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중 상당수는 초기 성년기부터 발생 및 호전과 악화를 반복한 정신과 질환의 재발인 사례가 많지만, 실제 전혀 증상이 없다가 처음으로 내원하는 이들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진단 기준과 측정도구를 활용한 후속 연구들에 따르면 정신과 외래로 내원하는 노인 환자 중 인지 저하가 전혀 없는 경우는 20%, 경도인지장애에 해당하는 이들 중에선 50%가 경도행동장애 진단을 만족한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흔한 증상은 감정·충동 조절의 어려움이었고, 그다음으로 의욕 감소와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 지각 및 사고 이상 등이었다.
감정 조절과 충동의 문제는 기분장애 증상으로도 발현되기에 실제 이러한 환자들이 경도행동장애이고 추후 치매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판단하기 위해선 면밀한 병력 청취를 통해 증상의 발현 시점 및 경과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외래 치료 중에도 내원 시 주 증상 외에 인지 저하가 새롭게 나타나거나, 혹은 진행되지 않는지 세심하게 평가해야 한다. 만일 인지 저하 경과가 있을 때는 신경심리검사를 시행해 객관적으로 유의미한 인지 저하가 있는지 확인하고 자기공명영상(MRI) 촬영과 혈액검사로 원인 질환을 감별해야 한다.
최근에는 알츠하이머병의 새로운 치료제들이 도입되고 있기에 아밀로이드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검사로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신경 퇴행성 질환이 인지 저하의 원인으로 확인된다면 이를 경감하는 치료 약물을 사용해 경과를 늦출 수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외래로 내원한 노인 환자를 경도행동장애라고 판단하더라도 현재까진 위의 진단 및 치료를 선제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다. 경도행동장애라도 치매로 진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한국 의료 현실에서는 유의미한 인지 저하가 없다면 알츠하이머 관련 치료 약물 등의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직 경도행동장애 진단 및 치료에 대해 합의된 가이드라인은 없는데, 외국에선 다양한 치매 관련 임상 시험에서 경도행동장애를 대상군으로 포함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향후 경도행동장애에 관한 새로운 임상 진료 방침이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년기에 초발한 행동·성격 변화가 있을 때 꾸준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및 평가를 하면서 치매로의 진행을 민감하게 관찰하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조치다. 그러므로 50세 이후 뚜렷한 행동이나 성격 변화가 6개월 이상 지속되어 사회활동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전문의 상담을 받기를 당부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