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조건

2025-08-31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힘』은 몰입을 ‘행복과 성취의 원천’으로 정의했다. 인간이 진정한 만족을 얻는 순간은 외적 보상이 아니라, 도전과 능력이 맞아떨어진 과제에 온전히 몰두할 때라는 것이다. 명확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적절한 난이도라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몰입의 상태에 들어가고,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는 것이 책의 핵심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 논의는 AI 이전의 맥락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를 정의하고 탐구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 자체를 AI에 위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 복잡한 계산을 풀어내는 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일, 심지어 감정변화의 동인을 유추하는 일조차도 AI가 몇 초 만에 결과를 내놓는다. 『몰입의 힘』이 전제했던 몰입의 조건은 바로 이 지점에서 흔들리고 있다.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과정을 완주하며 얻던 몰입은 줄어드는 대신, AI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취향 맞춤형 세계 속에서의 몰입이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몰입의 기준이 바뀐 AI시대

탐구에 대한 몰입 줄어들고

취향과 소비는 과몰입 현상

생산적 몰입 전략 설계해야

스트리밍 플랫폼은 사용자의 취향을 정교하게 분석해 다음 작품을 자동 추천하고, 쇼핑 앱은 개인의 구매 패턴에 맞춰 나만을 위한 상품을 제안한다. 심지어 팬덤 커뮤니티나 게임 플랫폼은 개개인의 관심사와 서사 흐름을 계산해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경험을 공급한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볼까, 무엇을 살까’를 탐색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리즘이 취향을 예측해 세계를 짜주고, 우리는 그 안에서 몰입만 하면 된다. 즉 AI 시대의 몰입은 탐구의 과정보다는 개인적 서사와 정체성의 소비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과몰입’이라는 트렌드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몰입은 학습이나 문제 해결 같은 생산적 활동에 집중하는 긍정적 상태를 가리켰다. 그러나 지금의 ‘과몰입’은 드라마 캐릭터, 아이돌 세계관, 게임 스토리나 취미 같은 서사·정체성에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뜻한다. 겉으로는 가볍게 농담처럼 쓰이지만 사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AI가 문제풀이와 정보 탐색을 대신하는 시대, 인간은 신체적 경험과 감각적 공명, 그리고 정체성을 확인받는 경험 속에서만 진짜 몰입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더 적극적으로 서사와 감각, 공동체적 체험에 자신을 던진다. ‘과몰입’은 결핍의 표지나 피해야 할 과잉이 아니라, AI가 채워주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몰입 에너지가 새로운 방식으로 분출되는 신호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흐름을 부정적으로 보면 탐구적 몰입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깊은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학습과 연구는 몰입을 통해 성취와 성장을 제공했지만, 지금의 몰입은 감각적이고 파편화된 경험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생산적 축적이 부족해지는 상태로 사회 전체가 탐구적 몰입의 토대를 잃어버린다면, 장기적으로 학습 역량과 혁신 능력 자체가 약화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몰입은 단순한 취향 소비를 넘어 시장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다. ‘과몰입’은 팬덤을 형성하고, 커뮤니티를 결속시키며, 브랜드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성장시키는 원천 에너지다. 실제로 K팝 팬덤은 음악을 넘어 굿즈·콘서트·영상 플랫폼으로 확장되며 글로벌 경제권을 만들었고, 게임 산업 역시 단순한 오락을 넘어 스토리·아이템·문화가 결합한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소비자들은 기능이나 성능보다 자신이 어떤 이야기와 정체성에 속해 있는지를 더 중시한다. 즉, 과몰입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 사회적 연대와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 에너지이며, 기업이 미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새로운 몰입 자원이다.

결국 문제는 균형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탐구의 몰입은 줄어들고, 소비적 몰입으로 치우쳐 간다. 그러나 동시에 신체적 몰입이나 감각적 경험, 직접 부딪치며 얻는 몰입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기업과 사회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의 시장 기회를 활용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탐구와 문제 해결의 몰입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신체와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몰입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교육, 조직문화, 업무 설계 차원에서 이러한 균형을 고민해야 한다.

AI 시대의 몰입은 양면적이다. 『몰입의 힘』이 말했던 전통적 몰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조건은 달라졌다. 학습과 탐구의 몰입이 위축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새롭게 부상하는 과몰입을 어떻게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할지를 모색해야 한다. AI가 척척 답을 내주는 시대, 우리가 어떤 몰입을 잃고 무엇에 더 깊이 빠져드는지를 묻는 일은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기업의 전략, 사회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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