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천성적 이타심과 연민

2024-10-16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3월 전태일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가족을 데리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도피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옷 만드는 기술자인 아버지는 전쟁통에 일감이 많은 하야리라 미군부대에 취직했다. 형편이 나아져 꽤 큰 마당이 있는 방에 세 들었다. 전태일 생애에서 가장 널찍한 집에 살았다. 부산에는 피난민이 밀려들어 집집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때 어머니 이소선의 회고다. 이 글에서 소선은 곧 어머니 이소선이다.

어린나이임에도 큰아들 태일은 피난민들에 대한 동정심이 남달랐다. 평소에도 어린 태일은 자기가 먹을 밥이나 군것질거리가 생기면 피난민 자녀들에게 얼른 가져다주었다. 때로는 소선이 외출하였을 때 피난민 아이들을 모두 불러 쌀을 볶아서 먹이곤 하였다.

하루는 소선이 밖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태일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태일아, 네 옷은 어디에 두고 그렇게 옷을 벗고 앉아 있느냐?” 놀란 소선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쳐다보니 태일이 입던 옷은 이미 남의 아이가 입고 마당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뛰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 저 아이가 옷이 없어서 내 옷을 입혀줬다. 내 옷은 아버지 옷을 잘 잘라서 나한데 맞게 옷을 만들어 주면 되잖아?”

소선은 그렇게 말하는 태일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심하게 야단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라며 칭찬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소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기특한 놈이구나. 그래, 제 것을 움켜잡고 남한테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백배로 낫다. 남을 도와주려는 것이니 너는 참으로 기특하고 훌륭한 아이다.”

소선은 아들 태일에게 다른 옷을 입히며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성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 어떻게 해서라도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야지…” 소선은 태일의 앙상한 가슴을 매만지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 『전태일 실록Ⅰ. 최재영. 2020. 동연』 88쪽〜89쪽

이때 전태일의 나이는 만 4〜5세 쯤이었다. 이 나이면 아직 의식을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태일이 평생 보인 놀랍기 그지없는 이타적 행위는 타고난 심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자라서 의식을 지닌 뒤의 글이다. 『전태일 수기』에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저마다 특징적인 재능이 있다. 과학적 재능, 미술적 재능, 음악적 재능, 문학적 재능, 언어적 재능, 운동적 재능, 경제적 재능, 정치적 재능, 학문적 재능, 종교적 재능, 사교적 재능 외에도 가치 있는 수많은 재능들을 지니고 있다.

사람에 따라 어떤 분야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을 수재라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 수재, 운동을 잘하는 수재, 예술에 뛰어난 수재들이 있다.

수능시험 성적이 상위 0.1%에 드는 학생, 세계적 음악 콩쿠르에 입상하는 음악인,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하는 학생, 노벨상을 타는 문학인,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운동선수 등 이런 사람들이라면 수재임이 틀림없다.

수재 가운데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재들이 있다. 이른바 인류의 천재들이다. 3살 때 악기를 연주하고 5살 때 작곡했다는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 16살 때 중국 고전 『노자』를 해석하고 21살 때 중국에서 가장 심오하다는 책 『주역』을 해석한 왕삐(王弼),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과 과학발명을 주도한 레오나드 다빈치,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과 미적분을 비롯한 수학의 발견, 그리고 운동법칙을 발견한 뉴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인간인식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힌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은 일반인들이 상상으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재능을 지닌 인류의 천재들이다.

수재들은 대체로 노력으로만 이룰 수 없는 재능을 타고 나야 한다. 피겨 스케이트 불모지 한국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김연아는 피나는 훈련이 있었지만 타고난 체력과 몸의 유연성이 탁월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어려서부터 연습벌레이긴 했지만 18살 때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재들도 이럴진대 인류 천재들의 타고난 재능은 일반인의 인식능력을 초월해 상상조차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학문, 예술, 스포츠 등에서는 인간의 재능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나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고귀한 심성을 발휘하는 재능은 우리가 쉽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에게 가장 숭고하고 고귀한 재능은 무엇일까? 뭇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에 평화를 바라는 윤리와 도덕행위를 실천하는 재능이 아닐까? 붓다와 예수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이 분들의 윤리와 도덕적 가르침은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을 거룩하다고 하며 거룩한 이들을 성인(聖人)이라 부른다.

여러 사회활동에서 거룩한 재능을 인류에게 보여 준 이들이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의료를 베푼 슈바이처, 인도 빈민들을 위해 평생 봉사한 데레사 수녀, 스위스의 빈민아이들 교육을 담당한 페스탈로치 같은 이들을 우리는 그 분야의 성인이라 부른다.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우리의 이태석 신부도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 해도 거리낌이 없다.

베트남에서 민족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호찌민이다. 그런데 쿠바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이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쿠바뿐만 아니라 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쿠바의 인물하면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를 떠올린다. 하지만 쿠바인들이 성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호세 마르티'다. 쿠바 전국 어디서나 중요한 거리에는 그의 동상이 있고 주택가에서 마당이 있는 집에는 그 흉상을 모시고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쿠바의 호세 마르티를 우리나라로 평가하자면 수운 최제우와 녹두장군 전봉준을 합한 인물이라 보면 된다. 사상가요, 문필가요, 혁명가요, 실천적 독립운동가였다.

호세 마르티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백인 아버지는 가난한 스페인 군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시와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쿠바독립을 향한 현실에 일찍 눈을 떴다.

마르티가 만 15살이던 1868년 쿠바 최초의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어린 마르티도 민중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감옥에 갇혀 족쇄를 차고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쿠바의 정치 감옥’이라는 멋진 글을 썼다. 건강이 악화돼 강제노동에서 벗어났다.

16살 때 '해방조국'이라는 신문을 만들고 조국 쿠바독립의 정당성과 그 열정을 담은 시를 발표했다. 「쿠바혁명 앞의 스페인 공화국」이란 글에서 스페인과 쿠바,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모순을 분석했다. 훌륭한 기록을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때 썼다고 하니 호세 마르티는 믿기 힘든 재능이 있었다.

1871년 마르티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독립운동하던 쿠바 의대생 8명이 잔인하고 부당하게 총살당했다. 학생들 나이는 겨우 열여덟이었다. 마르티는 그 사건과 관련한 멋진 시 「11월 27일 죽은 내 형제들에게」를 썼다. 그 해 마르티는 쿠바에서 스페인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스페인의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새파란 몽상가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공화국을 꿈꾸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태어나기 31년 전에 죽은 위대한 선배 마르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마르티는 지식인이었지만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죠. 정말로 존경할만 합니다. 그는 작가입니다. 거의 전기작가에 가까우며 모든 위대한 애국자들을 무척 특별한 문체로 찬양했습니다… 나는 가끔씩 그의 글을 ‘단어의 시내에 있는 사상의 폭포’라고 표현했습니다.”

1878년 마르티는 쿠바로 다시 돌아왔지만 정치활동을 한 이유로 1년 뒤 다시 스페인으로 쫓겨났다. 멕시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로 돌아다니다가 1880년 미국 뉴욕에 정착하면서 '조국(La Patria)'이란 신문을 만들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집필활동과 정치활동으로 멈추지 않았고 그 명성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졌다.

시인 마르티의 시는 소박한 감정이 넘치면서도 근대적 감각을 표현해 세계문학사에서 근대주의 선구자로 평가한다. 이 모든 활동은 조국 쿠바의 독립혁명을 위한 부업일 뿐이었다.

1892년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결성하고 이어서 미국과 멕시코, 중미 및 카리브 지역에서 혁명군을 모집해 독립투쟁을 준비했다. 세상일에서 참전군인을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마르티는 전쟁경험이 전혀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탄할만한 확고한 사상과 신념을 지녔고 독립의 철학과 보기 드문 인문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이런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분을 따랐고 당에 동조했다.

'쿠바혁명당'은 레닌보다 앞선, 혁명을 하기 위한 정당이었다. 이처럼 마르티는 진보적인 반노예주의자, 독립주의자였으며 본질적으로는 인문주의자였다. 마르티는 마르크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기에 높이 살만하다."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한 신문에 이렇게 추모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비단결 같은 영혼과 강철 같은 손을 지닌, 유명하기 그지없는 독일인 칼 마르크스를 기념하면서."

반란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지역은 독립전쟁을 원했다. 동지를 모은 마르티는 1895년 4월 11일 무장투쟁을 위해 바하마 군도의 이과나 섬을 출발해 관타나모 부근의 마리시 곶에 상륙했다. 그리고 식민군대와 싸우던 중 그 해 5월 19일 도스 리오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말 한대로, 글 쓴 대로 살다가 눈을 감았다.

죽기 전 미완성으로 남은 편지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오늘날까지 내가 했고 앞으로 내가 할 모든 일은 쿠바의 독립을 바탕으로 미국이 아메리카의 나머지 국가들로 뻗어나가려는 시도를 막는 것이네.’ 이 글이 바로 마르티가 남긴 유산이다.

마르티가 죽은 뒤 64년이 지나 카스트로를 비롯한 후배들은 혁명성공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후배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선배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아바나의 하늘관문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라 부르고 아바나 시내 중심광장을 호세 마르티 광장이라 이름 짓고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탑과 동상을 세웠다.

호세 마르티가 남긴 말은 어떤 수사(레토릭)가 아니었다. 말은 신념이었고 그 신념과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살았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는 나의 신념을 나누고 싶다.”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다음은 호세 마르티의 어린시절 모습이다.

아홉 살 소년은 쿠바의 사탕수수 밭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오가야 했다. 더러운 움막에서 무더기로 지내는 흑인노동자, 곧 노예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슬픈 눈빛과 탄식 같은 노래가 마음 아팠다. 흑인 노예에게 폭력을 가하는 양심도 없는 감독을 볼 때는 몸서리쳤다.

갇힌 소년 노예의 눈동자와 마주치기도 했다. 능력이 없는 소년 마르티는 어린 흑인 노예를 옹호할 수단이 없다고 느낀 그 순간, 자신의 어린 영혼에 분노가 스며들었다. 나중에 '나의 흑인들'이라고 부르게 된 연민이 그 당시부터 마르티 가슴 속에 싹텄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민을 지울 수 없었고 글로 쓰면서 연민의 싹은 정의감으로 자랐다.

"누가 흑인들에게 채찍질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늘 그들에게 빚진 자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릴 때였습니다. 아직도 치욕으로 물든 뺨들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당시부터 흑인들을 옹호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들에게 빚진 것'을 생각하는 삶, 그것이 9살 마르티가 '평등'이라는 신념을 갖게 한 동기였다. 그들의 치욕을 잊지 않는 것, 그 연민과 분노는 내성적이었던 마르티를 혁명을 꿈꾸는 시인으로 성장하게 했다. 억압받는 존재의 발견은 마르티를 고뇌하는 시인으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다재다능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마르티는 유년시절 두려움이 가득한 자기 또래 노예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또한 마탄사스에서 지내면서 자신에게 자연의 비의(秘儀 비밀스런 종교의식)를 가르쳐준 늙은 노예의 순수함을 마르티는 사랑했다.

그 사랑이 마르티가 백인이면서도 아프로쿠바노(afrocubano 아프리카계 쿠바 사람)라는 정체성을 확신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소년은 이 잔혹한 억압 앞에서 맹세했다. “내 삶을 바쳐 이 죄악을 씻겠노라고!"

- 김수우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에서 발췌 인용

전태일의 어린시절에 관한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어린시절의 호세 마르티였다. 호세 마르티는 백인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의 천성적인 성품은 흑인 노예에게 무한한 연민을 보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길거리 비렁뱅이와 다름없었던 전태일은 18살 즈음부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옷 만드는 노동자로 일했다. 봉제가게에서 같이 일하는 자신보다 서너 살 어린 여성노동자의 처지를 이렇게 수기에 적었다.

함께 일하는 열 두어 살 먹은 소녀들은 대부분 누렇게 뜬 얼굴에 못 먹어서 퀭한 눈동자를 한 채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이나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먼지 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주린 배를 안고 온종일 햇빛 한 번 못 보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으려 타이밍 약을 먹으며 뾰족한 바늘 끝으로 제 살을 찍어냈다.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하는 데도 늘 하루 생계가 위태롭기만 하고 병든 부모님께 약 한 첩 해드릴 수도, 자라는 동생의 학비를 댈 수도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의 돈 잘 버는 부모들을 위해, 청계천 어린 여공들의 꿈은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를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또는 ‘사랑스러운 동심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린 동심들은 일찍 출근해서 얼마 일하다 곧 졸았다. 태일이는 어린 동심들이 아침을 굶어 힘이 빠져있다는 걸 알았다.

태일이가 퇴근 후 12km 떨어진 집에 돌아갈 차비로 어린 동심에게 풀빵을 사준 사실은 결코 우연하거나 일회성 동정심이 아니었다. 자신을 철저히 희생한 동정심이었다. 차비가 없어 서너 시간을 걸어 밤늦게 집에 가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민(憐愍)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연민은 동정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보여주기’식의 동정의 손길이 아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가장 인간적이면서 순수하고 숭고한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을 비극을 경험하는 요소이며, 인간의 내면에 연민이 일어나 카타르시스(정신 정화)를 느낀다고 했다. 불교의 화엄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은 거미줄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짜여 있어 거미줄의 한편에서 신음하는 괴로움이 다른 반대편 거미줄에서도 그 고통을 전한다고 한다.

세상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저 혼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연관돼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얽히고 설켜 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을 선택하기보다는 서로 연민을 갖고 선을 행하면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게 화엄사상이다.

주역(周易)에서는 남을 위한 선한 행동으로서의 연민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선을 쌓는 적선(積善) 행위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사에서 지극하고 온전한 연민으로 보고 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사랑의 의미는 상대방의 감정을 같이 느끼는 공감능력이다. 예수의 생애는 그야말로 이타적인 연민의 감정을 최고조로 보여준다. 성경 시편 82편의 8절 가운데 3절과 4절은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 주고 가난한 자와 고통받는 자의 권리를 찾아 주어라.” “약한 자들과 어려운 자들을 구해 주고 악한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주어라.”

위 시편의 말씀이 기독교가 인류에게 요구한 핵심교리 가운데서도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에서 이보다 더 거룩한 교리가 어디 있겠는가? 타고난 선한 덕성의 능력이 약한 자와 어려운 자에게 향할 때 역사는 진보한다고 나는 믿는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에서 분신한 만 22세 젊은이 전태일의 고독한 행위는 한국노동해방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였다. 몸이 불꽃이 된 삶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던진 영원한 사랑의 사자후였다.

호세 마르티의 어린 흑인노예를 향한 맑은 영혼! 전태일의 노예에 다름없었던 어린 여성노동자를 향한 맑은 영혼! 인간의 재능 가운데 가장 바탕을 이루어야 할 재능은 도덕적, 윤리적 이타심이 아닐까?

두 사람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의 진정한 벗이었다. 두 사람의 연민에 따른 위대한 실천은 인류가 가야할 양심과 용기의 길잡이다. 우리는 전태일을 우리 시대 성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나아가 한국의 현대인으로써 세계사적인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히 합당한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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