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 시대 청중 숫자가 우열 가리는 척도
수백명 거리유세와 TV토론이 '뉴노멀'
[서울=뉴스핌] 이재창 정치전문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9일 저녁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규모 청중이 참석한 유세를 벌였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같은 시각 서울역에서 대규모 군중 유세를 벌였다. 열기는 뜨거웠지만 청중 수는 과거 '100만 유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21대 대선 후보의 유세장에는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대선 후보의 유세를 듣기 위해 모여든다.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도 보기 힘들다. 대부분 소규모 집회다. 30여 년 전의 '100만 군중 유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초라할 따름이다.

군중 집회의 절정은 '1노3김'이 대결을 펼친 1987년 대선이었다. 그 당시는 군중 동원을 통한 세 과시가 대선 판도의 우열을 가리는 중요한 척도였다. 모두 사활을 걸었다. 격전장은 여의도 광장이었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김영삼(YS) 통일민주당 후보, 김대중(DJ) 평화민주당 후보가 각각 100만 명 이상이 모인 가운데 연설을 했다. 물론 실제 100만 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987년 11월 30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평민당 후보의 유세에는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후보들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1주일 뒤 토요일인 12월 5일엔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100만 명 이상의 청중을 동원해 맞불 유세를 폈다. 김대중 후보와 정통 야당의 적통을 다툰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 후보는 서울에서 유세를 펼쳤다.
이런 대규모 군중 유세는 1992년 대선 초반까지 이어졌다.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는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유세를 가졌고,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보라매 공원에서 대규모 유세를 가졌다.
유세장 주변에는 전국 각지에서 지지자를 동원한 관광버스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지지자들은 각 지역 팻말을 중심으로 모였다. 도시락과 일당을 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00만 명을 동원하려면 최소 수십억 원이 들었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과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김영삼 후보는 "여의도 광장에서 백만 명 단위의 대규모 유세를 할 경우 선거 자체를 과열시킬 뿐만 아니라 수도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켜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드릴 것이 분명하다. '찾아가는 소규모 유세'만 하겠다"고 선언했고, 김대중 후보 측도 여의도광장의 대규모 집회를 취소했다.
여의도에서의 대규모 군중 집회는 1997년 15대 대선 때부터 사라졌다. 2004년 선거법 개정으로 정당 연설회가 금지됐고, 방송 연설(1992년)과 TV 토론회(1997년)가 도입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방송이 새로운 대중 접촉 수단으로 떠올라 대규모 직접 유세를 대체했다. 대규모 군중 유세는 3김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대규모 집회는 소규모 거리 유세로 바뀌었다. TV 토론이 유세보다 몇십 배 영향력이 커졌다. 대선 후보들은 TV 토론에 사활을 걸었다. 선거 문화 자체가 변한 것이다.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 이준석 후보도 유세보다 TV 토론 준비에 훨씬 신경을 쏟는다. 그만큼 지지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세 후보는 지난 18일 첫 TV토론을 가졌다. 23일, 27일에도 토론이 예정돼 있다. 두 차례의 토론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 대선은 과거 대선에 비해 열기가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세장 청중 수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우선 일찌감치 자리 잡은 이재명 대세론과 보수 진영에 퍼진 패배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보수 진영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후보 단일화가 '막장 드라마'로 끝난 것도 보수의 결집을 느슨하게 했다.
승리가 유력한 진보 진영과 희망이 희박해진 보수 진영 모두 긴장감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코로나 유행이 비대면의 일상화를 몰고 온 영향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 대선이 종반전으로 가면 다시 양 진영이 결집할 가능성이 높다.
100만 명이 참석하는 군중 유세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소규모 거리 유세와 TV 토론은 이제 선거 문화의 뉴 노멀이 됐다.
leejc@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