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존재들의 헌법

2025-04-20

지난겨울 한국 사회는 속성으로 헌법을 공부했다. 헌법의 귀퉁이 난제들에 골몰했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생중계를 강의처럼 지켜보았다. 여름마다 장마가 오듯 상처받은 헌법은 이제 개헌론에 직면하고 있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할지, 4년 중임으로 할지를 규정한 법인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누가 임명할지 규정한 법인가? 개헌론은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주장인가.

헌법이란 대한민국은 어떤 국가인지, 그 땅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는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그 시민들을 위해 봉사할 공권력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한 사회계약이다. 헌법은 총강, 기본권, 그리고 통치구조로 구성돼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제2조처럼 대한민국의 기본 구성에 대한 규정이 총강이다. 개헌론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4년 중임제니 하는 것들은 통치구조에 해당한다. 가장 중요한,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실체는 바로 기본권을 선언한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있다. 통치구조 개편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기본권과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헌법이 사회계약이라면 개헌에는 갱신된 시대정신이 담겨 있어야 한다. 헌법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시대의 청사진이자 삶의 의지이다. 그렇게 역사적으로는 신체의 자유가 규정됐고 행복추구권이, 노동권이, 장애인의 권리가 규정돼왔다. 개헌이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본권의 시대적 갱신이자 선제적 선언이다. 기존 헌법이 약속한 기본권 보장에 흠결은 없었는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권리 주체가 등장했는지, 미래세대에게는 무엇이 필요할지 묻고 새로운 언어로 약속을 문서화하는 일이다.

애매한 타협의 결과물이라는 현행 헌법이 등장한 1987년 이후 대한민국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세 가지만 나열해보자.

첫째, 다양한 범주의 시민들이 등장했다.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 이후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열악한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의 이름을 알게 됐고, 만 18세가 되면 정처 없이 사회로 내보내지는 보호종료아동들을 캠페인에서 보게 됐다. 수용시설에서 스러져간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낯선 땅에 들어와 고된 일을 하며 꿈을 꾸는 이주노동자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조손가정과 한부모가정의 아이들, 10년 전 경악스러운 자살률을 기록했던 당시의 7080 노인들과 지금 그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2030 여성들까지. 지난 40년 국가에 구체적 의무를 부과하지 못하는 선언적 조문에 이제는 묶여 있을 수 없는 이들의 권리를 새로운 헌법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둘째,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피해자가 죄인 취급받던 시대, 죽음은 있으나 책임은 없던 시대의 공전 궤도를 바꾸기 시작한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참사와 그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 사회적 애도의 가치, 안전한 삶이라는 기본권, 공적 기록물의 작성과 보존 그리고 공개의 중요성 등을 학습했다. 이후에도 버젓이 반복되는 참사들 가운데서도 시민사회는 참사에 대응하는 회복력을 키워왔다. 헌법이 침묵하고 있는 영역에서 참사의 피해자들과 시민들은 헌법 초안을 작성하듯 사회적 약속들을 써내려왔다. 비통과 연대의 경험을 통해 한 줄 한 줄 써온 이 약속들을 어떻게 헌법에 녹여낼 것인가.

셋째, 농사를 짓던 땅과 물질을 하던 바다는 오랫동안 의존해 살았던 이들의 삶을 묘하게 뒤틀기에 충분할 만큼 변했다. 기후변화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생존 기반을 가장 먼저 교란하고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자연도 말하는 존재임을, 그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중앙국가 중심의 개발 기획이 지역의 환경과 삶에 남긴 상흔들은 지역소멸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공권력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엘리트들의 교체와 상호 견제를 조장하는 효과적인 선거·정당구조를 설계하는 과제에 비하면 이런 질문들은 소소할지 모른다. 헌법 34조 5항에 박제된 ‘신체장애자’라는 구시대적 용어를 ‘장애인’으로 수정하자는 개헌론은 농담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말한다. 분명히 기억하자. 지난겨울의 민주주의는 그 소소한 이들이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이 땅 모두가 그 소소함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참여를 통해 이들의 말을 듣고, 이들에게 응답하는 그런 개헌에 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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