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격침, 당포함 39명 영혼…박정희 분노가 K군함 키웠다

2025-04-02

K조선 연구

“여기는 완전히 백지 상태입니다. 울산 조선소에서 군함을 만들긴 어렵습니다.”

청와대에 올라온 보고는 비관으로 가득했다. 울산 현대조선소가 1호선인 26만톤(t) 거대 유조선을 진수한 이듬해인 1975년의 어느 날이었다. 보고서 작성자는 당시 해군에 복무 중이던 손운택 박사와 김재관 서울대 조선공학과 학과장, 김훈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조선해양연구실장 등 3인.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울산 현대조선소에 내려가 우리 기술로 군함 건조가 가능한지 살펴보고 돌아온 참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정주영 회장은 자신만만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귀한 손님에게 영빈관도 내주었다. 정 회장은 당시 손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며 “이곳에서 30만톤(t) 배도 만들어내는데, 3000t 정도 되는 구축함은 10척도 더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런 자신감이 청와대 보고서에 담기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자신감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었다. 손운택 박사의 기억이다.

“배, 그러니까 선체는 만들 수 있었죠. 그런데 군함이 어디 선체만 갖고 된답니까. 각종 통신·작전 장비, 함포, 소나, 레이더…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분야에선 완전 백지 상태였어요. 그러니 ‘이건 안 된다’ 결론 내고 청와대에 보고했죠.”

한국이 배다운 배를 이제 막 만들어 팔기 시작한 때였다. 한국은 왜 군함까지 만들려고 했을까.

국내외 정세가 절박함을 키웠다. 북방한계선(NLL)을 마주한 북한은 시시때때로 도발해왔다. 1967년 1월 동해에서 우리 해군 당포함이 격침돼 3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엔 청와대가 습격당했다. 1969년엔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으로 “아시아의 각국은 자신의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고 공언하며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을 내비쳤다. 한국 정부로썬 충격이었다. 자주국방이 절실해졌다.

전혀 준비된 게 없었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1974년 박정희 정부는 2000t급 구축함 국산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율곡사업’의 일환이었다. 1975년에는 방위세를 만들어 국민 도움도 받았다. 이런 상황이니 ‘울산은 백지 상태’라는 보고는 무시됐다. 1975년 7월 15일 현대중공업은 한국형 전투함 시제 업체로 지정됐다. 상선에서 특수선으로, K조선의 기술력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는 반세기 그렇게 시작됐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1.조선소는 왜 ‘군함’에 뛰어들었나

“그때만 해도 정부가 회사별로 방위산업 육성 아이템을 하나씩 떼어주던 시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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