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한 대중국 무역정책을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미국의 주요 테크 기업들이 숨가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중국은 포기할 수 없는 거대 시장이다. 이들 기업은 미·중 관계가 더 악화하기 전 서둘러 중국에 ‘러브콜’을 보내는가 하면, 곧 출범할 트럼프 2기 행정부를 향해서도 협력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이날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국제공급망 진흥박람회’가 열릴 예정인 베이징의 한 박람회장을 찾았다. 쿡 CEO는 현지 기업들과 만나 “애플은 중국 시장을 매우 중시한다”며 “중국의 협력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애플은 없었을 것”이라며 ‘립 서비스’를 던졌다. 그는 같은 날 리창 국무원 총리 주재로 열린 비공개 좌담회에도 참석해 공급망 이슈를 논의했다.
중국은 애플로선 거대 시장이자 주요 파트너다. 아이폰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5%가 넘는다. 아울러 300여곳에 달하는 애플 부품 협력사 중 절반이 넘는 157곳이 중국에 있다. 아이폰을 조립하는 정저우 폭스콘 공장은 가장 큰 생산 파트너다.
트럼프가 예고한 대중국 관세는 애플에 치명적이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공급망 측면에서 ‘탈중국’ 행보를 택할 수 있다고 관측한다. 이에 쿡 CEO는 트럼프 취임 전 중국 당국과 부지런히 만나며 해법 찾기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그는 지난 22일에는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장관)과도 만나 미·중 관계 등을 논의했다.
세계 최고 AI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도 부쩍 중국과의 접촉면을 늘리고 있다. 제이 푸리 엔비디아 글로벌 담당 부사장은 지난 25일 왕서우원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장관급)와 베이징에서 만났다. 푸리 부사장은 “엔비디아는 중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여긴다”면서 “중국의 협력 파트너들과 소통을 강화하고 중국 디지털 경제 발전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번 회동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한 새로운 반도체 제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성사됐다. 해당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엔비디아가 서둘러 중국과 접촉해 대응책 모색에 나선 모습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첨단 AI 반도체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현재 엔비디아가 팔 수 있는 제품은 사양이 낮은 버전뿐이다. 그럼에도 엔비디아는 올해 120억달러(약 17조원) 정도의 AI 칩을 중국에 판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경한 대중국 무역정책과 자국 내 제조업 유치를 예고한 트럼프의 취임을 앞두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대만의 TSMC 등 동맹국 기업들은 저마다 ‘트럼프 눈치 보기’에 나선 형국이다. 특히 TSMC는 중국 고객들의 주문을 끊고 미국에서 이사회까지 열겠다고 예고하며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서고 있다.
반면 애플·엔비디아 같은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트럼프 취임 후에도 중국 사업에서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중 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미국의 ‘새 권력’을 향한 제스처도 잊지 않는다. 쿡 CEO는 대선 전부터 트럼프 당선인과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공을 들여왔다. 그는 2019년에도 트럼프 1기 행정부를 설득해 중국산 아이폰을 관세 부과 대상에서 빼낸 바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지난주 “새 행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한다”며 “모든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고객을 지원하고 시장에서 경쟁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인과 친분이 깊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미·중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테슬라의 최대 공장은 상하이에 있으며 지난해 매출 가운데 중국 비중이 20%가 넘는다. 이 때문에 한 외신은 “머스크가 중국에 대한 강경한 경제 정책에 반대하기 때문에 트럼프와 결별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