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 떠오르고 있는 동남아 역사의 새로운 시각을 정리해 보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남양사”란 제목을 붙이는 데 두 가지 조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하나는 “남양”이란 이름이 중국 내지 동아시아의 관점에 묶일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육지 아닌 바다만을 무대로 설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관점을 내세우는 것은 내가 동아시아에 살고 있고 동아시아 역사를 중심으로 공부해 왔다는 데 이유가 있다. 그런데 동남아 역사의 새로운 시각은 종래보다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비중을 늘리고 있다. 이 점은 앞으로 근세 이래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육지보다 바다에 치중하는 것은 동남아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물론 동남아에서도 사람들은 바다보다 육지 위에서 더 많이 살고 활동했다. 그러나 동남아 모든 지역이 바다에서 멀지 않고, 따라서 그 생활과 활동에 바다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생산력이 약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제국’
인류문명의 출발점을 보통 1만여 년 전의 신석기혁명으로 본다. 이 무렵에 생산양식이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에 ‘농업혁명’이라고도 한다. 농업의 발전이 생산력의 급속한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에 문명의 빠른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 산업혁명 때까지 인류문명의 발전은 농업생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해양지역은 집약농업의 형성에 불리한 자연조건이어서 농업문명 시대 역사의 전개에서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 동남아 지역 인구의 전 세계 인구 중 비율은 지금 약 9%인데 16세기까지는 그 절반 이하의 비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농업생산력이 약한 해양지역이 활발한 문명 현상을 보일 때도 있다. 고대그리스의 에게해문명이 그런 예다. 교역 활동이 어느 규모 이상 자라난 단계에서 해상 활동력을 가진 지역이 큰 세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해양지역의 이런 주도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농업세력으로 주도권이 돌아간다.
내륙의 유목지역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시적 주도권을 가질 때가 있다. 자체 생산력이 약한 유목지역이 뛰어난 기동력을 발판으로 주변 농경지역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13-14세기 몽골제국이 두드러진 사례이지만 작은 규모의 사례는 유라시아대륙 도처에서 거듭거듭 나타났다. 토머스 바필드가 말하는 ‘그림자제국(shadow empire)’이 대개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목제국도 해양제국도 같은 규모의 농업제국에 비해 기록을 적게 남겼다. 20세기의 기술 발전에 따라 그 흔적이 전보다 많이 밝혀지고 있어서 인류 역사의 고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늘어나고 있다. 농업국가 위주의 역사학을 넘어서는 중요한 창문이 된 것이다.
동남아의 ‘통상시대’를 가져온 변화
동남아 지역의 초기 수출품은 공산품도 농산물도 아니고 향료, 진주 등 자연에서 채취한 특산물이었다. 농업지역의 생산력 증가와 사회 분화에 따라 사치품의 수요가 일어나면서 소량의 특산물이 반출된 것이다. 특산물의 채취와 운송에 종사하는 인구도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업지역의 사치품 수요가 커지면서 대륙 사람들이 동남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7-11세기에 활발했던 스리비자야의 성쇠에 이 변화가 비쳐진 것으로 보인다. 스리비자야의 해상 패권은 외부세력과 현지세력의 합작으로 이뤄진 것인데, 1025년경 인도 남부 촐라제국의 침공은 외부세력의 진입이 어느 고비를 넘어선 단계를 보여준다.
앤서니 리드는 〈통상시대의 동남아 1450-1680〉(2권, 1988, 1993)에서 15-17세기를 동남아의 ‘통상(通商)’ 시대로 설정한다. 정치적 변화나 생산력의 변화보다 교역의 확장이 역사의 전개를 주도한 시대로 보는 것이다.
리드가 통상시대의 기점으로 보는 15세기 중엽은 동남아 지역의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 시기다. 교역의 확장은 그 이전부터 상당 기간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현상이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기록은 많지 않았다. 리드의 제안이 나온 후 30년 동안 앞선 시기의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온 지금, 통상시대의 범위를 앞쪽으로 넓힐 필요를 느낀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이 동남아 지역의 교역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를 대표하는 것이 교역 중심지로서 말라카의 역할이다. 앞선 시기와 이후 시기의 비교에 말라카의 사례가 중요한 참고가 되겠다.
무력보다 서비스업으로 번영을 이룬 말라카
에릭 탈리아코쏘는 〈아시아의 바다에서〉(2022)에서 말라카의 해운 정책을 스리비자야와 비교한다. 스리비자야는 무력으로 항행을 통제하면서 비싼 통행세를 징수한 반면 말라카는 항행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낮은 관세만을 징수했다는 것이다. (205-206쪽)
이 차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다. 스리비자야가 패권을 누리던 11세기 이전과 말라카가 번영한 15세기의 교역 상황을 비교해야 한다. 교역량이 많지 않던 11세기에는 약간의 해군력으로 통제가 가능했고 소량의 사치품이던 교역 상품에서 큰 세금을 뽑아내야 했다.
스리비자야가 쇠퇴한 후 새로 일어난 세력들은 스리비자야의 통제 정책을 모방하려 했다. 정화의 함대와 마주친 중국인 해적들도 말라카의 창시자 파라메스와라도 모두 스리비자야의 후계자와 여당(餘黨)을 자처하고 있었다. 말라카 중심의 자유무역 체제 성립에는 정화 함대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 중국은 동남아 출산품의 가장 큰 시장이었다. 중국의 상품 수입을 쉽게 만드는 정화의 몇 가지 조치 중 중요한 것이 말라카를 개방적 교역항으로 이끈 것이었다. 이 조치가 시대 변화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말라카가 단기간에 이 지역의 중심교역항(entrepot)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품목이 후추다. 15세기까지 후추는 중국에서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정화 이후 중국의 후추 가격은 계속 내려가 일반인의 생필품이 되었다. 종래의 사치품이 생필품으로 변신하면서 물동량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해상운송의 관리도 통제정책에서 방임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찍부터 시작된 동남아의 ‘플랜테이션’
인도 남부에서 산출되던 후추가 14세기부터 수마트라 등 동남아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초기에는 ‘재배’라기보다 ‘채집’에 가까운 생산방식이었다. 한 차례 후추나무를 심은 땅은 십여 년 생산한 뒤에 버려졌다. 지력(地力)을 유지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배 지역이 확장되면서 재배 방법도 발전했다.
동남아의 후추 재배는 플랜테이션의 원시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수출을 위한 대량 재배가 각종 재래 품종과 외래 품종을 대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천연 채취물 대신 그 자연환경을 이용한 작물 재배가 지역 주민들의 생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정향, 육두구 등 고유의 향료들도 생산방식이 바뀌었다. 원래 향료제도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업으로 향료를 채취해 팔고 있었다. 향료의 외부 수요가 커지면서 향료 채취를 전업으로 하는 인구가 늘어나 식량 등 생필품을 외부에서 수입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15세기 이전 동남아는 서쪽의 인도와 페르시아, 동쪽의 중국 등 큰 경제권들 사이의 교통로 역할에 그치고 자체 생산력은 빈약했다. 수출품은 소량의 천연 채취물에 불과했다. 11세기경부터 생산력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유의 특산물도 전업 채취 인구가 늘어나면서 단순 채취에서 재배에 가까워지고,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식량 등 생필품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16세기 이후 동남아에 진입한 유럽인도 처음에는 재화의 약탈에 주력했으나 차츰 자연조건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쪽으로 사업 방향이 바뀌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변화에 편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럽인의 출현이 이 지역의 역사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으나 사실은 기존의 역사 흐름에 표면의 파문을 일으킨 정도였다고 인식이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