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무엇을 소유한다. 참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어렵긴 뭐가 어려워? 유아도 그 정도는 다 아는구먼!”이라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올 듯하다. 하긴, 키즈카페에 널린 장난감 블록을 몇개 모아서 놀던 세 살배기 아이도 다른 아이가 그중 하나에 손을 대면 “이건 내 거야!”라고 소리 지른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이다. 왜 우리가 하필이면 소유권을 이런 식으로 여기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놀랄 정도로 어렵다. 사람들이 소유권에 대해 하는 발언을 모아 놓고 보면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토지·건물·보석처럼 유형의 재산만 소유할 수 있다고 흔히 단언한다. 실상은 어떨까? 인기 상품을 구매하려는 줄에서 내가 서 있는 위치도 당연히 ‘내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유명 매장이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대신 줄을 서주는 아르바이트가 인기다.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가방이나 휴대폰을 놓아서 ‘내 것’임을 표시한다. 영화나 노래 같은 무형의 아이디어도 소유한다. 심지어 사람도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소유의 대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유권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종종 아주 미묘한 상황적 요인에 따라 널뛰기한다.
다음의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A가 B에게 웃기는 이야기를 했다. B는 C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A와 B는 함께 차를 타고 파티에 가는 길이다. A는 B에게 오늘 밤 써먹을 요량이라며 웃기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파티에 도착하자마자, B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여러분은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만 B가 A의 소유물을 멋대로 훔쳤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여길까? 사람은 모름지기 남의 성과를 가로채서 부당하게 인기를 끌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왜 우리는 그 논리를 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적용하려 하지 않는지가 바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2022년에 진화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는 소유권을 담당하는 심리적 적응은 두 가지 인지 체계의 상호작용에서 유래한다고 제안했다. 첫째, 영토·음식물·짝짓기 상대 등의 자원을 차지하고자 다른 개체와 경쟁하게 만드는 체계이다. 물론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에서도 폭넓게 나타난다. 이 인지 체계는 어느 개체가 어떤 자원을 거머쥐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개체가 자원과 밀착해 있는가, 개체가 자원을 용도에 맞게 다듬었는가, 혹은 개체가 자원을 처음 발견한 당사자인가 등의 특정한 단서에 관심을 기울이게끔 한다. 예컨대 줄을 서 있다가 내 뒷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은 괜찮지만, 몇시간 후에 뻔뻔스럽게 돌아오면 내 자리를 잃게 된다. 나와 자리 사이의 밀착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개체와 협력해 상호 이득을 얻게 만드는 체계이다. 사냥한 고기를 함께 나누거나, 물물교환하는 등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타난다. 이 인지 체계는 두 개체가 장차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으면, 한 개체가 다른 개체의 특정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흔쾌히 존중하도록 한다. 달리 말하면, 상대방이 귀한 자원을 길바닥에 실수로 흘리고 갔더라도 나는 그 자원을 넘보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상대방과의 상호 협력을 통해 이득을 얻을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앞선 예시에서, A로부터 들은 웃기는 이야기를 B가 C에게 단순하게 전달하는 행동은 A와 B가 향후 협력할 가능성을 해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유권 심리는 자원을 얻고자 경쟁하는 체계와 남들과 상호 협력하는 체계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는 보이어의 이론은 내 궁금증도 해결해 주었다. 구내식당은 점심시간에 언제나 만원이다. 어떤 얌체는 식당에 오자마자 자리를 가방으로 미리 맡아 놓고 배식하는 줄에 선다. 그래서 먼저 와서 식판에 음식을 받은 사람이 정작 앉을 자리가 없어 난감해하기도 한다.
내 동료 교수님은 의협심이 넘친다. 자리를 차지한 가방들을 보이는 족족 치워 버려서 가끔 언쟁이 벌어진다. 왜 그들은 자리를 먼저 맡고 줄에 서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할까? 빈 탁자가 여럿인데 그중 하나를 먼저 맡는 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이 정작 자리가 없는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는 필자의 동료 교수님은 식당에 먼저 도착한 이들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여길 것이다. 남은 빈 테이블 가운데 어느 것이든지 차지할 수 있다는 ‘소유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