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산업에서 '협업'은 필수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술 난제는 복잡해지고 연구개발(R&D) 비용은 급증하면서, 한 기업이 모든 과제를 감당하긴 어려워졌다. 연구실과 양산 현장 간 간극도 커지며 글로벌 공동 개발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 가운데 벨기에의 반도체 종합 연구기관 아이멕(imec)은 대표 협력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국내 기업들도 이곳과의 협력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동진쎄미켐, EUV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동진쎄미켐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PR) 국산화를 이룬 국내 대표 전자재료 기업이다.
PR은 반도체 노광공정에서 회로 패턴을 형성하는 감광제인데, 동진쎄미켐은 과거 불화아르곤(ArF) 이미전 PR 개발을 위해 2005년부터 아이멕과 협력했다. 당시 국내에는 R&D를 위해 ArF 이머전 노광장비를 빌려 사용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2013년 국내 최초 양산을 시작했고, 뒤이어 2019년 극자외선(EUV) PR 개발에 착수했다. EUV 노광장비는 대당 2000억원을 웃돌지만 아이멕에서는 공유의 대상이다. 수백건의 샘플 평가를 거쳐 2021년 양산에 성공했다.
조성한 동진쎄미켐 연구원은 “EUV 장비의 활용뿐 아니라 전 세계 연구진과의 교류를 통해 기술 개발의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며 “앞으로도 아이멕과 협력해 EUV PR 제품군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파크시스템스 AFM 세계 1위 도약
파크시스템스는 아이멕과 협력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원자현미경(AFM) 장비 시장 1위에 오른 기업이다. 아이멕은 2013년 고성능 AFM 장비 개발 협력사를 찾았고, 파크시스템스는 미국 대형업체인 브루커와의 2년간의 경쟁 끝에 2015년 공식 파트너로 낙점됐다.
이후 'NX-3DM', 'NX-웨이퍼' 등 두 가지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이멕에 파견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 주요 고객사 연구원들은 실사용 기반의 요구사항과 피드백으로 장비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는 빠른 시일 내 실제 장비 구매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 파크시스템스의 연간 매출은 2015년 200억원에서 2024년 1751억원으로 연평균 27.3% 성장했으며, 올해 2000억원 돌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조성우 파크시스템스 전무는 “현재 새로운 차세대 장비 공동개발을 아이멕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HPSP, 고압 어닐링 세계 최초 상용화
HPSP도 고압 수소 어닐링(HPA) 장비를 아이멕과의 협력을 통해 완성했다.
어닐링 공정은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웨이퍼에 생긴 미세한 상처를 치유해 전기적 특성을 복원하는 공정이다. 기존에도 포밍가스 어닐링(FGA), 급속 열처리(RTA·RTP) 등의 어닐링 공정이 있었지만 반도체 공정이 더욱 미세화되면서 기술적 한계가 발생했다. 공정 온도가 높고 수소 농도와 압력이 낮아 회로 손상 위험이 더 컸던 것이다.
이에 아이멕도 반도체 소자 성능 개선을 위한 방법을 모색해왔고 HPSP와 2015년부터 저온·고압·고농도 수소 환경의 HPA 장비 개발 협업을 시작했다. HPSP는 짧은 기간 다양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양산라인에 적용 가능한 기술을 확보했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장 공략에 나섰고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성공적으로 공급했다.
작년 말에는 차세대 소자용 고압 산화 공정(HPO)이 가능한 장비를 아이멕에 추가 공급해 평가를 진행 중에 있다. 차세대 3D 메모리 및 3D 로직 소자에 최적화된 저온 산화 공정 개발을 위한 장비다.
HPSP 관계자는 “아이멕은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신뢰하는 소자 특성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장비 개발 전략 수립과 고객사 영업에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벨기에(뢰번)=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