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

2024-07-25

추모도, 추억도 전염 된다. 지난 23일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서클홀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북콘서트 ‘46년 만에 돌아온 스물의 시인, 남정국 불을 느낀다’가 열린 70석 규모의 소극장형 강연장은 만석이다 못해 서 있는 청중으로 꽉 차 있었다. 『불을 느낀다』(엠엔북스)는 1978년 봄 북한강 유역 대성리에서 사고로 타계한 고려대 인문학부 신입생 남정국(1958~1978)의 유고시집이다. 두살 터울 누나 남인복 ‘문학뉴스’ 편집인과 고인의 지인들이 뜻을 모아 그가 남긴 27편과 일기, 초고와 메모 등을 묶어 펴냈다. 말하자면 사후 46년 만에 나온 데뷔 시집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시집을 읽어보았으나 “반세기 앞을 내다보는 예술가적 시인의 풍취”(백학기 시인 해설)를 읽어내기엔 내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했다. 그저 ‘글감’이나 얻을까 해서 찾아갔다가 북적이는 현장 분위기에 다소 놀랐다. 김영란 전 대법관·권익위원장, 신기남 전 국회의원 등 알만한 이름들이 고인의 가족·친구와의 인연으로 참석했다. 나머지는 알음알음 시집을 접했거나 문학회 등의 경로로 모인 이들이었다. ‘활자중독자’를 자처하며 요즘 독후감계(그런 게 있다면)의 대세로 활약하는 김미옥 문예평론가의 진행과 감상평이 호기심을 자아냈을 법하다. 그렇다 해도 100여명 참석자를 한데 묶은 건 동시대를 살았던 스무살 청년의 시적 열정으로 보였다.

“난 그 친구가 랭보·김수영 같은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의 시문을 질투했고 뛰어넘고 싶었다.” 패널로 참석한 노혜경 시인이 부산고 재학 중의 고인과 어울렸던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종종 옆길로 샌 발언은 ‘그때 우리가 얼마나 치기 어렸던가’를 회상하는 동창회 분위기로 번졌지만 객쩍진 않았다. 고인과 고3(여의도고) 및 대학 신입생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마치 삭제됐던 프로그램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객석 발언으로 화답했다. 죽음과 맞닿은 삶이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닌 ‘문학 중년’들이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을 매개로 추모도 추억도 기분 좋게 감염되는 듯했다.

“사람은 가도 좋은 노래는 남으니 자신의 삶보다 영원한 걸 남겼다.” 얼마 전 이 세상을 하직한 음유시인이자 ‘학전’ 대표 김민기를 보내며 어느 추모객이 한 말이다. 그 말처럼,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46년 만의 유고시집 발행에 앞장 섰던 중·고교 문예반 동창 김강석 KPI뉴스 고문은 “친구의 묵은 빚을 갚은 느낌, 이제라도 세상의 재평가를 받게 해줘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고 했다. 소설가 김연수는 “스무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살이 아니라 스무살 이후가 온다”고 했는데, 그 이후를 살아본 사람은 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임을. 재소환된 청춘의 열정이, 치열하게 살아온 ‘스무살 이후’들을 위로하는 현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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