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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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자주 머물던 곳으로 눈이 간다. 보노라면 집중하는가. 혹한이라 겨우내 움츠렸으니, 바람 잔 날을 보아 흙을 밟자 한다. 몸이 안 좋아 무리하지 말려는 것이지만, 갇혀 있는 삶은 딱하다. 실수로 불행을 자초하는 수가 있다.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건 자식이다. 석회질만 남은 노인의 뼈는 삭은 나뭇가지다. 숲을 스치는 순한 바람에도 부러지는 삭다리.
하지만 너무 조신하면 몸을 사리게 되니, 생활인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니다. 이도 한쪽으로 쏠리거나 기울지 말고, 중간지점에 서면 좋지 않을까 싶다.
‘자주 보노라면 관심’이 된다는 담론을 지나칠 뻔했다. 부부가 아파트 13층 베란다 창가에 앉기를 좋아한다. 남향이라 겨울에도 어중간한 초봄 볕만치 다사롭다. 한라산의 능선이 꿈틀거리는 동세도 내게는 요체(要諦)다. 계절의 변화를 읽으라며 자신을 추스르게 다가오는 암묵적 짓의 언어다. 아내와 마주 앉아 차 한잔하고 있으면, 62년을 함께 해온 세파가 눈앞으로 출렁여 오기도 한다.
이곳에 이사와 4년째, 맞은편 동에 사는 한 어르신에게 눈길이 자주 간다. 머리 허연 파파노인, 구순이 넘었을까. 아침 일찍 아파트에 오는 한 사찰의 주간보호센터 차를 타고 집을 나가, 오후 5시면 어김없이 가정으로 돌아온다. 망원렌즈를 장착한 것처럼 내 눈이 어르신에게 가 있다. 아침보다 저녁 시간에 집중해 하루를 마무리하는 쪽으로 눈이 간다. 차가 도착하면 여성보호사가 앞서 내려 차의 출입문을 열고 어르신의 손을 잡아준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갑자기 어르신의 행동에 변화가 온다. 한나절을 집 밖에 있었으니, 가족들이 보고 싶었을까. 이따금 보호사의 손을 놓고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빠른 걸음을 내디딘다. 입구 쪽으로 완만하게 나 있는 경사로를 이용하지 않고, 가운데 여덟 계단을 타고 오른다. 마음이 화급한지, 보호사를 따돌린다.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보호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가 가족에게 맡겨놓고 올 것이다. 잠시 뒤 보호사가 내려오고 승합차가 움직이는 것으로 어르신의 하루가 마감된다. 저녁부터 밤새 어르신의 방에 불이 켜진다. 원통 모양 한 뼘 길이의 짙은 노란색 전등.
언제부턴가 무심결 어르신 방에 불이 켜졌나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오래된 일이다. 연세답지 않게 나고 드는 등 꼿꼿한 뒷모습이 보기에 좋다. 오늘도 늦은 저녁 창가에 앉으면서 눈이 어르신 방에 가 있다. 뒤따라오던 아내와 눈이 마주쳐 웃고 있다. 뜻밖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웬일일까?’ 초저녁인데도 어르신 방에 불이 꺼졌다. 한밤중에 자리에 들기 전에 눈을 보냈지만, 불빛이 없다. 동살 틀 무렵 잠에서 깬 눈이 서성였지만, 어르신 방의 불빛은 꺼진 채로다. 나들던 시설의 차가 끊어진 것 같고 노인도 안 보인다.
‘그새 무슨 변고야 있을라고.’
사흘 뒤, 귀갓길에 보호사로 보이지 않는 웬 중년여성이 노인을 부축해 경사로로 접어든다. 가족인가 보다. 천만다행이다. 무심결에 한숨이 나온다.
어르신 방에 불이 켜졌다. 사흘 만이다. 오래오래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