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누군가 입덕 계기를 물어보면 ‘열심히 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면 입덕까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덕질은 어떻게, 얼마나 해야 진짜배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요? 두 반응의 사이에서 “아이돌 팬은 이럴 것”이라는 묘한 편견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해묵은 ‘OO녀’ 프레임, 아이돌 팬은 ‘빠순이’라는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덕질에 쏟는 시간이나 기력을 생각하면 저는 ‘라이트 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팬도 있어요!’ 혹은 ‘모든 팬이 다 빠순이인 건 아니거든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덕질에 진심인 팬들을 보며 “누군가의 취미에 대한 평가는 정중히 사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덕질은 제 덕질입니다. 덕질, 그건 제 맘이잖아요?
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이 기록해 갈 ‘아이돌 덕질 이야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주변에 덕질 공개하는 편이야?’
이대로 잠들기 아쉬운 날에는 보통 웹서핑을 합니다. 그때 한 온라인 게시판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법한 질문을 클릭해본 건 ‘덕질’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한 그룹에 입덕한 이후 ‘덕질이라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거든요. ‘제목이 곧 내용’인 글의 답변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절대 안 함”, “굳이 말 안 하는 편”,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음”과 같은 반응에 저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역시, 덕질은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진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기엔 여기저기에 덕질 얘기를 많이 했네요. 새빨간 거짓말이라 민망합니다. 괜히 “아이돌 덕질 이야기를 써보라”는 이야기를 듣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굳이 말 안한다’는 답변에 공감합니다. 한편 ‘아니, 취향 존중이라는 말도 모르나. 어르신들도 덕질하는 세상에 아이돌 덕질이 뭐 어때서?’라고 조금 답답하기도 했어요.
그날 본 댓글 중 제 눈길을 끈 건 ‘일부러 아이돌 팬임을 전시한다’는 답변이었습니다.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는 취미와 일부러 보여줄 필요가 있는 취미 사이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일부러 전시한다’는 말에선 ‘탈코(탈코르셋) 전시’나 ‘숏컷 챌린지’처럼 나를 드러내 아이돌 팬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해소하겠다는 어떤 결의마저 느꼈습니다.
덕질에 대한 편견, 그중에서도 아이돌 덕질에 대한 편견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빠순이’라는 해묵은 멸칭은 보통명사처럼 사용되고, ‘극성팬’ ‘사생’과 같은 부정적 단어도 많습니다.
‘시간 안 아까우냐, 생산적인 일을 해라’ ‘루키즘, 외모지상주의 아니냐?’ ‘네가 아무리 좋아해도, 그 아이돌은 너를 모른다’ ‘나이 먹어서 아이돌을 좋아하냐?’ ‘돈을 얼마나 쓰고 다니는 거냐?’
사실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들입니다. 그건 제가 비교적 덕질에 우호적인 환경에 놓여서일 수도 있고, 흔히 말하는 ‘라이트 팬(아이돌을 얕게 좋아하는 팬)’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콘서트가 열리면 올콘(모든 날짜의 콘서트에 출석하는 것)을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루면 족합니다. 조용히 콘서트를 즐기는 편이라 응원봉 같은 굿즈도 없습니다. 그들의 무대를 좋아하지만 해외 콘서트나 지방 콘서트, 공방(방송사의 음악 프로그램 공개방송)까지 참여할 기력은 없습니다. 다른 오프라인 이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범은 구매하지만 한 장씩 삽니다. 자연스럽게 굿즈나 포카(포토카드)도 모으지 않습니다. 간간이 그들의 소식을 받아볼 뿐 상호작용하고 싶다는 욕구까지는, 아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돌에게 큰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 팬이어서, 그들을 따라다니지 않는 ‘건전한’ 팬이어서 위와 같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걸까요? 그렇다면 ‘코어 팬(아이돌을 깊게 좋아하는 팬)’은 불건전한 걸까요?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떡볶이, 트로트, 아이돌… 뭐가 다른데
오히려 저는 “에이~ 그 정도면 입덕은 아니다. 아이돌 입덕이란 말이야”와 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언젠가 친구에게 입덕 계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곰곰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제게 되물었어요.
“그러니까 너는 ‘ㅂ’의 뭐가 좋은 건데?”
“열심히 하는 점?”
“진정한 팬이라면! 단박에 오빠(ㅂ그룹에는 오빠가 없습니다)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아!”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저의 구구절절한 입덕 계기 중에 ‘그들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멋진지’ ‘재능이 있는지’와 같은 찬사는 없었다는 겁니다. ‘입덕’이라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포토카드 한 장 정도는 가지고 다니며 ‘예절샷(음식과 꾸민 포토카드를 함께 찍는 인증사진)’ 정도는 찍어줘야 한다나요. 더군다나 친구는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도 크지 않은데 무슨 덕질을 하냐며 ‘그건 덕질이 아니’라고 저를 꾸짖었습니다. 10년 이상 한 그룹을 좋아해 온 ‘진성 코어팬’ 동생을 둔 언니의 답변이긴 했습니다. (사실 친구의 덕질 기준은 지나치게 높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아무도 저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아니, 얼마나 좋아해야 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건데!”라고 울분을 쏟아낸 적도 있어요. 내가 좋다는데 말야!
그런데 ‘취미’는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모든 취미와 기호에는 깊고 얕음이 존재합니다. 어떤 대상을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떡볶이를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 떡볶이를 먹어야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배달 음식을 시킬 때 ‘이왕이면 떡볶이가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떡볶이가 좋아해서 맛있는 떡볶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떡볶이집을 차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혼자 먹는 것이 심심해 떡볶이 모임을 만들지도 모르고요.
무엇이든 좋아하는 마음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유독 아이돌 팬 문화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극단적인 부분만을 확대해 모든 팬이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요. 남들보다 떡볶이를 좀더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는 아무리 그래도 음식인 떡볶이와 사람을 좋아하는 팬 문화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트로트 팬들이 아이돌 팬이 듣는 잔소리를 듣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시간 안 아깝냐’ ‘아무리 좋아해도, 그 가수는 너를 모른다’와 같은 잔소리 말이어요. 중장년이 대다수인 트로트 팬에게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잔소리를 젊은 여성이 대다수인 아이돌 팬에게는 마음 놓고 해왔던 것 아닌지 되묻고 싶어요.
2024년 K-POP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 ‘국위선양’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K-POP을 그 자리로 끌어올린 아이돌 팬들의 위상은 대체 왜 나아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 산업을 지탱해 온 버팀목은 팬일 텐데요.
▼ 이아름 기자 areumlee@khna.kr
Q: 여러분도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으신가요? 저처럼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답답한 점 있으셨나요. 무엇을 보고 입덕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무조건적인 박수갈채 ‘주접’도 환영합니다.
▶ 구글 설문조사 링크 https://forms.gle/pw1RwdoDWo29RzSt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