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박태준’ 무식함 염려했나, 이대 나온 신부가 선물한 책

2024-10-09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장군과 화가… 전장의 인연, 빛났던 그들

21세에 군복을 입은 나는 36세에 군복을 벗었다. 노래 가사대로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 청춘’의 15년. 그중에 어찌 전쟁 3년이 잊혀지랴.

불쑥 김웅수 장군이 떠오른다. 포항 형산강에 배수진을 쳤을 때 그분은 대령이었다. 작은 체구에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장교였다.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북진이 시작되고 나는 김 대령의 보좌관으로 뽑혔다. 1950년 겨울의 원산·흥남, 그리고 청진. 우리는 청진 시청에 태극기를 꽂자마자 곧 밀려내려 왔다. 원통하고 서럽고, 그래서 후퇴의 행군길은 더 추웠다. 흥남이었나. 화학공장을 수색하다 카바이드 술통을 발견했다. 그걸 지프 뒤에 싣고 고무 호스를 꽂아 줄기차게 빨아 마셨다. 울분도, 추위도 함께 마셨다.

흥남 철수 하루 전, 나는 맹장염에 걸렸다. 야전병원 수술대 밑에는 동상으로 잘라낸 젊은 병사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가득 널려 있었다. 나는 꿰맨 자국이 아물 새도 없이 들것에 실려 양륙함(LST)에 눕혀졌다. 김 대령의 배려와 나를 따라다니던 학도병(강릉상고 3년 조규기. 육사 12기로 장교가 됐으나 한탄강에서 사고로 아깝게 숨졌다)이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5·16 당시 김웅수 장군은 군단장으로서 반대파에 섰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에 자리를 잡았다. 63년 말 공직에서 물러난 내가 유학을 가려 했던 곳도 바로 그분이 계신 대학이었다.

현재 아흔 살을 바라보는 김 장군은 워싱턴DC에 살고 있다. 70년대부터 가난한 동포 2세나 유학생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어 부지런히 인재를 키워냈다. 나는 미국 출장길에 가끔 찾아뵙기도 하고, 장학재단에 봉투를 보태기도 했다.(※편집자주: 이 글에서 ‘현재’는 2004년이다. 김웅수 장군은 2018년 2월 25일 별세했다.)

1·4 후퇴 직후 나는 강릉에 주둔하고 있다가 5사단 사령부로 이동됐다. 여기서 네 살 밑의 특별한 청년 문관을 만났다. 한인현. 1·4후퇴 때 할아버지를 모시러 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혼자 배를 탔다는 함경도 청년. 거제도까지 실려갔다 뽑혀 나온 그는 차트 만드는 솜씨부터 남달랐다. 나는 첫눈에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봤다. 파리로 유학이나 보냈으면 딱 좋았을 청년. 나는 그가 쓴 시(詩)의 유일한 독자였고, 그를 친동생처럼 돌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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