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준의 책이야기- 열 한 번째
이동준은 광주에서 출생했다. 책을 좋아하고 공상을 많이 한다. 현실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됐다.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만 동시에 긍정의 힘을 믿고 있다. 호기심도 많아서 여러가지 일에 관심이 많고 치과의사로서도 보람을 느끼고 있다.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한 편이며 겁도 없다. 도전을 좋아하고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목포교도소를 거쳐 현재는 전주교도서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다..
- 편집자 주
현재 우리나라의 헌법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제정됐다. 40년 가까이 다 되어간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고 인권보호 및 민주적 절차를 강조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헌법은 얼마나 오래됐을까? 미국 헌법은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 제정회의에서 서명됐고 1789년 3월 4일 발효됐다.
미국인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헌법은 신성한 문헌이며 그래서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배운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제도들은 거대한 설계, 즉 공화국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구성된 청사진의 일부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타협과 양보, 그리고 이를 위한 차선책의 역사를 흐릿하게 만든다. 또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핵심 제도,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반민주적이기까지 한 제도를 혼동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해방된 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족쇄를 찬 다수’이다.
미국의 헌법은 지금까지 27차례 수정됐다. 수정되면서 어쨌든 수 세기를 버텨왔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21세기인 현재 위협을 받고 있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의 구성방식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정치적 다수가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고 또한 선거에서 이기고도 통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13개 주의 안정적인 연합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경험 많고 실용적인 정치인들이었다. 1787년 제헌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제헌회의가 실패로 돌아가서 연합이 분열될 경우 미국은 불안정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미국경제가 위협받는 것은 물론, 더욱 중요하게는 모든 주가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의 지정학적 야망과 군사도발에 취약해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어떻게든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느낀 제정회의의 대표 55인은 일반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지도자들이 내리는 선택을 했다. 즉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타협을 추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일부 집단은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판을 깨버릴 만큼, 그리고 게임을 갑자기 끝내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작지만 영향력 강한 집단이 어려운 변화의 과정에서 탈퇴하겠다고 협박할 때, 건국 지도자들은 이들 집단에 상당한 특권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반다수결주의는 다수의 지배와 소수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숭고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변화를 가로막겠다고 위협하는 강력한 소수를 달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양보의 타협안이었다.
1787년 여름 미국의 건국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을 때 2가지 중대한 사안이 헌법적 합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연합에서 작은 주들의 역할, 그리고 노예제였다. 작은 주들은 독립전쟁 이후로 준독립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국가와 같은 뚜렷한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를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했다. 그래서 작은 주의 대표들은 새로운 정치체제 속에서 평등한 대표권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인구수가 아닌 주가 대표의 원칙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예제를 유지했던 남부의 다섯 주는 노예제를 하나의 제도로서 지키기 위한 사안에 집중했다. 노예제는 남부 주들에게 타협이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남부 대표들은 노예제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조항을 새로운 헌법에 포함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발했다. 그러나 남부지역의 노예 소유자들은 제정회의에서, 그리고 미국 전체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남부 노예제 주들의 대표들은 새로운 공화국에서 노예제의 존속을 보장받기 위해 '최대한 철통 같은' 반다수결주의적 보호를 요구했던 것이다.
합의에 이르려면 작은 주와 남부 다섯 주의 노예제 대표들을 달래야 했다. 그래서 제헌회의는 여러 가지 양보를 했다. 새로운 헌법은 노예제를 허용할 뿐아니라 노예제를 확고하게 보장함으로써 노예 소유주들의 손에 힘을 실어줬다. 노예제를 보호하는 사안은 미국의 헌법제정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종 문안에는 '노예제'라는 표현이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 제도적 유산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부 주들이 얻어낸 최고의 성과는 악명 높은 '3/5 타협안(three-fifths clause)'이었다. 이 타협안에 따라 노예 다섯 명을 자유민 세 명으로 계산하는 방식으로 노예를 각 주의 인구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 목적은 노예들에게 아무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의회의 의석을 배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3/5 타협안은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그 밖에 다른 반다수결주의 타협안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국 상원 시스템이었다. 작은 주의 대표들은 모든 주가 정치시스템 안에서 평등한 대표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구수가 5만9천 명에 불과한 델라웨어주가 그보다 5~7배 더 많은 인구수의 메사추세츠,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주들과 동등한 정치적 대표를 확보할 수 있는 대단히 반다수결적인 시스템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 제임스 윌슨은 주들의 평등한 대표권에 반대하면서 해밀턴처럼 이렇게 물었다. “누구를 위해 정부를 구성했는지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인간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주라고 하는 가상의 존재를 위한 것인가?” 하지만 작은 주들, 특히 코네티컷과 델라웨어, 뉴저지주는 적어도 하나의 의회에서 그들에게 평등한 대표권을 보장하지 않는 헌법은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델라웨어주 대표 거닝 베드퍼드가 평등한 대표권을 모든 주에 부여하지 않는다면 연합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제헌회의는 파국을 맞이했다. 베드퍼드는 “작은 주들은 그들과 손잡고 그들을 공정하게 대해줄 명예와 신뢰가 높은 해외동맹을 찾으려 할 것이다”는 말로 불길한 경고를 전했다.
대표들은 결국 연합을 유지하려면 작은 주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협상은 이뤄졌다. 그들은 소위 코네티컷 타협안에 따라 하원의원을 다수결 원칙에 따라 선출하고 의석수는 주 인구에 비례해 할당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새로운 3/5 타협안을 반영해서 말이다. 반면 상원의원은 인구와는 무관하게 주당 두 명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합의안은 신중하게 구상한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바로 차선책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정수반을 어떻게 뽑았을까? 매디슨이 지지하고 버지니아 계획에 포함된 초기 제안은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을 택하면 대통령이 의회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것을 우려한 많은 대표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임스 윌슨은 보통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행정수반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대표들 대부분에게도 '국민'이 직접선거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생각이었다. 결국 이 제안은 제헌회의에서 두 차례나 거부되었다. 특히 남부대표들은 대통령 직접선거에 분명하게 반대했다. 매디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노예들에 대한 투표권 박탈을 포함해 남부에서 실시한 강력한 투표권 제한정책으로 남부 주들은 북부에 비해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 수가 훨씬 적었다.
제헌회의는 다시 한 번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대표들은 21일 동안 이 사안에 대해 논의했고 무려 30번의 표결을 진행했다. 다른 어떤 사안보다 많은 횟수였다. 그러나 모든 제안이 부결로 끝났다.
8월 말 제헌회의 종료시점이 다가오면서 이 문제는 결국 미해결사안위원회(Committee on Unfinished Parts)로 넘어갔다. 미국의 헌법 설계자들은 군주제가 아닌 상황에서 중세시대 이후로 교황을 선출한 방식과도 비슷한 '추기경 회의'식으로 합의했고 이 방식은 나중에 선거인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주의 하원에다가 두 명의 상원의원을 합친 수와 같도록 정했다. 남부 주들은 하원의원이 3/5 타협안을 기반으로 선출된다는 점에서 그 방식에 만족했다. 그리고 작은 주들은 상원의원이 평등한 주 대표권을 기반으로 선출된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이를 통해 남부 주와 작은 주들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보통선거의 경우보다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인단 제도는 원래의 취지를 실현하지 못했다. 해밀턴은 선거인단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주 의회가 선택한, 그리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유명인사나 뛰어난 엘리트 등으로 구성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선거인단은 곧바로 정당들의 경쟁무대가 되었다.
상원 필리버스터는 헌법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미국인들은 필리버스터라고 하면 견제와 균형의 헌법체계를 종종 떠올린다. 필리버스터는 대표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로 상원 내에서 소수가 표결을 가로막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다시 말해 대부분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실제로 60표 이상의 압도적 다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필리버스터를 헌법이 보장하는, 중요한 소수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의회의 압도적 다수원칙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그리고 “압도적 다수원칙으로 인해 자유로운 정부의 근본원칙이 훼손되고 다수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으며 또한 권력이 소수에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해밀턴 역시 압도적 다수원칙으로 인해 “소수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을 구속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미국 상원에는 필리버스터가 없었다. 대신에 상원은 소위 예전의 질의 제안이라고 하는 원칙을 채택했는데 상원은 이를 통해 다수의 찬성만으로 토론을 끝낼 수 있었다. 1806~1917년 동안 실질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사용한 경우는 스무 차례에 불과했다. 즉 십 년에 두 번도 되지 않았다.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필리버스터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사용됐다. 한 가지 이유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상원의원이 필리버스터를 하기 위해서는 발언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1970년대 개편 이후로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뜻을 전화로, 혹은 이메일로 정당 지도자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필리버스터는 급증했고 오늘날 “모든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60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진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필리버스터가 모든 상원의 입법과정에서 실질적인 압도적 다수원칙으로 진화한 것이다.
필리버스터 옹호론자들은 이를 미국의 근본적인 전통이라고 포장하지만 사실 필리버스터는 뜻하지 않게 생겨났으며 미국 역사에서 대부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적인 소수 거부권은 최근의 발명품이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또다른 요소는 대법원이다. 대법원의 당파적 편향은 간접적이지만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선거인단과 상원의 특성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미국 전체 인구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원 다수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유권자 다수와 대법원 구성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면서 미국 대법원은 점차, 그리고 뚜렷하게 여론과 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역사적 관점에서 대법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판결이 국민의 뜻과 너무 멀어지지 않기 위해 대법관이 조율을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최근 연구는 대법원 판결과 다수 여론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은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비민주적인 상태로, 경쟁 정당보다 더 적은 표를 얻은 정당이 정치권력에서 핵심적인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선거제도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게 과잉대표를 허용할 때, 그래서 정당들이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유권자의 생각에 반응해야 할 압박이 줄어든다. 그럴 때 정당들은 그들의 주장을 확장해나가야 할 경쟁적인 압박에서 벗어나 내부에 집중함으로써 급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20세기에는 현대 민주주의 시대, 즉 민주주의 이전에 왕과 귀족이 설계한, 대중 다수에 대한 많은 제도적 족쇄를 해체하는 시대가 열렸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은 악명 높은 반다수결주의 제도를 폐지하거나 약화시켰다. 이러한 제도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불안정과 혼란, 혹은 독재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도 20세기에 다수의 지배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정헌법 제19조는 투표권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했고, 스나이더법은 시민권과 투표권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까지 확대했다. 또한 미국은 상원을 민주화했다. 미국 헌법은 상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유권자가 아니라 주 의회에 부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상원 선출을 위한 직접적인 보통선거를 의무화한 1913년 수정헌법 제17조의 비준은 민주화를 향한 중요한 이정표였다.
하지만 전 세계 모든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20세기에 걸쳐 간접선거를 폐지했던 반면,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그대로 남았다. 선거인단 제도를 개혁하거나 폐지하려는 시도가 수백 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미국은 다른 모든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대법원 판사에 대한 임기제한이나 의무정년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 대법원 판사들은 실질적으로 종신제를 누리고 있다.
미국이 헌법수정을 바라보는 자세를 그대로 고집한다면 민주주의 개혁은 불가능한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과는 달리, 미국인들은 그들의 헌법에 뜯어 고쳐야 할 결함이 있다거나 그 일부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제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헌법은 결코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다. 어쨌든 인간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선거인단 제도는 설계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임시방편의 차선책이었다는 사실을, 상원의 평등한 주 대표방식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수적으로 밀려서 채택된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국경은 변하고 인구는 증가한다. 신기술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이전 세대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미국인들은 대개 전면적인 개혁안에 회의적이다. 개혁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수많은 제도적 거부권과 대단히 양극화된 정당들이 활동하는 정치시스템에서는 더 힘들다. 그러나 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광범위한 세 가지 개혁영역이 있다.
투표권을 확립해야 한다: 투표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현대적인 정의에서 핵심 요소다. 간접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지도자를 뽑는다. 모든 시민이 투표할 수 있을 때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출한다. 이러한 점에서 투표가 일부 시민에게 힘들거나 큰 비용을 요구한다면, 가령 투표하기 위해 몇 시간 줄을 서거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민주적인 선거라고 말할 수 없다.
선거결과가 다수의 선택을 반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어느 요소도 패자가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해야 한다. 또한 상원을 개혁해서 주에서 선출한 상원의원 수가 각 주의 인구 수와 비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하원과 주 의회에서 '최다득표자를 선출하는' 선거규칙과 단일 선거구제를 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
지배하는 다수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반다수결주의 의회 및 사법제도를 약화함으로써 의회 다수에 힘을 실어주는 방안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상원 필리버스터를 폐지해야 한다. 대법원 판사에 대한 임기제한을 규정해야 한다. 또한 헌법수정을 더 쉽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개혁은 우연히, 혹은 하룻밤 새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강력한 정치적 움직임이 작용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시작은 개혁을 공적인 사안으로 만드는 노력이었다. 개혁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옹호자와 조직자, 대중 사상가, 의제 형성자들이 정치토론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람들이 열망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점차 바꿔나가야 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들은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은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이들을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라고 부른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깔끔한 복장에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노골적인 반민주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들은 애매모호하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극단주의 세력은 여론의 지지나 정당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지만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그들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극단주의자들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용인하고, 묵인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그들을 어떻게 구별할까? 첫째,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당의 주류에 반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내쫓으려고 한다. 둘째, 극단주의자와 모든 관계를 끊는다. 셋째, 그들을 확실하게 비판한다. 넷째, 이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필요한 경우라면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거나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쟁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다.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 많다. 노골적인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극단주의 세력을 용인하고 묵인하고 애매모호하게 대한다. 현재의 시국에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우리는 다수결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고 소리 높이지만 그 소수가 오히려 반대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그 소수가 국민 대다수의 이익을 과연 반영하고 있을까? 그 소수가 권력으로부터 먼 약자인 '충직한 민주주의자'인가?
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를 구분하기 위해 극단주의 세력을 대하는 모습을 잘 살펴봐야 한다.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지, 그럴 듯하게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듯하나 폭력을 용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누가 반다수결주의의 맹점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찬 이들이 심오한 이상이나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쉽고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민주주의의 붕괴에 핵심적인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국회는 단원제라서 미국처럼 상원과 하원의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인해 보통선거의 원칙이 훼손당할 확률도 훨씬 적다. 또한 비례대표제도 운용되고 있어서 이 점은 소수의 반다수결주의 횡포로부터 더 자유롭다. 하지만 여전히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비민주적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과연 적절한지,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 폭력(언어적 폭력도 포함해)을 행사하는 이들이 과연 정당한지, 또한 극단주의 세력의 횡포가 벌어지는 것을 묵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언론을 통해 은근슬쩍 극단주의자들을 옹호하려는 자들이 있지는 않은지, 자성해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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