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정착스토리](25) 평양 '금수저' 피아니스트 황상혁 교수..."백악관서 차이콥스키 연주하는 게 꿈"

2025-10-19

장관 아버지에 어머니는 외국인병원 의사

중국 파견 중 한국사람 접촉해 보위부 추적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 이루고 싶습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51) 씨는 북한 특권층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가 국토환경보호성(우리의 기후에너지환경부에 해당) 장관 출신이고 어머니는 평양 외국인병원 의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김일성의 경호를 책임지는 호위사령부의 부부장으로, 황 씨가 태어난 곳도 평양의 5호 초대소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북한을 탈출해 한국행을 택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외화벌이를 위해 파견됐던 중국에서 한국 사람과 만났다는 게 꼬투리가 됐다. 보위부가 자신의 행적으로 집요하게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남조선'과 접촉했다는 것 자체가 반역죄가 되고 마는 게 북한 체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통일교육원 객원교수이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학생으로 지내는 그는 올해로 한국 정착 11년차를 맞았다. 하지만 여전히 책가방을 맨 학생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황 교수는 탈북을 결심하면서도 한국행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평양에 남겨진 가족을 생각해 북한이 극단적 거부감을 보이는 한국을 피하고, 미국이나 일본으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3국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폐 기흉으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결국 2014년 한국으로 입국해 정착했다.

탈북민 정착지원 시설인 경기도 안성 하나원에서 생활하던 당시 황 교수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가족을 두고 떠나온 미안함 때문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굳게 다문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홀로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며 지냈다. 그렇게 그는 경기도 분당의 임대아파트에서 남한살이 첫날밤을 맞이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질문이 있다. 바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이다. 황 교수 역시 지역 하나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며 직업상담사와의 상담을 통해 여러 가능성을 모색했고 남한에서 음악과 관련된 공부를 이어 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고, 일자리도 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어느 날 고혈압 증상이 있어 대학병원에 심전도검사를 예약 하고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학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그는 무려 12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고, 뇌 손상으로 인해 완전한 회복은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어야 했다.

장기간 입원은 그에게 사치였다. 병원비 부담으로 결국 퇴원을 결심했고, 텅 빈 집에서 외로움과 막막한 미래에 짓눌린 채 한동안 깊은 좌절 속에 빠져 지내야 했다.

이후 하나센터의 연계로 지역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강사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강의를 시작했고, 분당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삶의 균형을 찾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16년 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북한에서 '주체식 음악'을 전공했던 그에게 클래식과 실용음악으로 나뉘는 남한의 음악 교육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피아노 연주 실력은 충분히 인정받았지만,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 점수가 필요했다. 기초가 없는 변변치 못한 공부로 인한 영어의 장벽 앞에서 그의 기대는 점점 작아졌다.

결국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해 어디를 가든 영어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생활비 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까지 겹치며 졸업은 계속 미뤄졌지만 안간힘을 다해 뛰었다.

마침내 지난해 그는 8년 만에 석사 학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석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그는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살아온 독특한 경험을 학문적으로 융합하고, 북한 전반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대학원을 찾았고, 결국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단순한 학위 취득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더욱 깊이 있게 다지고 싶었던 확고한 의지였다.

비록 음악 전공자였지만,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전혀 새로운 분야의 방대한 이론 들을 접해야 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첫 학기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삶의 전부와도 같은 피아노 연주는 계속됐다. 2017년 영산아트홀에서 열린 '나라 사랑 평화음악회' 무대에 섰고, 2019년에는 미국 한인교회들을 순회하며 연주를 이어갔다. 작년에는 롯데 콘서트홀에서 미국 하버드 래드클리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을 다시금 입증했다.

이런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사실 어릴때부터 돋보였다고 한다. 남부럽지 않은 유년 생활을 지낸 황 교수는 9살이 되던 해 평양 학생소년궁전에서 피아노에 입문했다. 두각을 나타낸 그는 평양예술전문학교를 거쳐 14살에 평양음악무용대학 전문부에 편입했다.

20세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같은 대학 피아노 강좌의 교원으로 임명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황 교수의 앞길에는 그야말로 장애물이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의 대학원격인 3년 과정의 박사원을 졸업하면서 지휘자 자격을 취득했고, 촉망받는 음악가로 자리매김했다. 탄탄한 집안 배경과 뛰어난 재능을 모두 갖춘 그는 2003년 북한을 대표하는 예술교육 전문가로 중국 파견단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잘 나가는 음악 영재'라 해도 결국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3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친 뒤 2006년 북한으로 돌아온 황 교수는 '김원균 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 교수로 재직했다.

2011년 그는 다시 중국으로 파견됐다. 그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그는 귀국을 앞둔 무렵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보위원이 그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점점 꼬여갔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때 한국 언론에는 '평양음악대학 교수가 탈북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황 교수는 여전히 홀로 지내고 있다. 학업 등으로 인해 아직 결혼을 생각할 상황은 아니지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반드시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또 훗날 미국 백악관에서 영어로 남북한 음악의 차이를 설명하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그 순간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고 덧붙였다.

탈북 직후 황 교수를 만나 그의 존재를 처음 알리는 인터뷰를 했던 기자는 당시의 고민 가득하고 좌절에 빠져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황 교수는 그런 아픈 시절을 이겨내고 한국 생활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꿈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음악을 향한 그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다시 평양을 찾아 가족들과 만나고, 남북한에서 갈고 닦은 음악적 기량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그의 멋진 모습을 기대해 본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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