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의 추억

2025-05-29

1990년대의 어느 겨울, 지금은 없어진 종로3가 단성사에서 신인 감독의 패기 혹은 객기 넘치는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혼자 킬킬거린 적이 있다. 드넓은 극장 안에 관객은 10명 남짓이었고, 극장주는 본전 생각이 난 듯 난방을 껐다. 그렇게 썰렁한 분위기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자가 찬 입김을 뿜어대며 박장대소하자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다른 관객들 보기 부끄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지금도 기자의 개그코드를 이상하게 여긴다. 어떤 영화든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내 즐기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일 뿐이라는 시답잖은 변명을 했었다.

영화에 한없이 너그러운 기자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른바 괴작(怪作)들이다. 괴작이란 괴이한 작품, 여러 가지 의미로 괴상한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일부에서 추앙받는 컬트영화와는 태생부터 다르다(기자가 재밌게 본 이상한 영화는 뒤늦게 컬트 반열에 오르고,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까지 했다). 굳이 말하자면 괴작은 끝까지 보기 어려운 ‘망작’쯤으로 여겨진다. 인터넷만 뒤져보면 사람들이 인정하는 괴작 리스트를 찾아볼 수 있다. 제목과 무관한 줄거리, 느닷없는 전개, 배우는 심각한데 관객들은 실소한다면 괴작 명예의 전당에 오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 영화계에서도 괴작의 역사는 길다. 특히 1980년대 무수한 한국 영화들이 해당된다. 당시 외국 영화 수입을 위해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쿼터제가 존재했고, 제작자들은 쿼터를 채우기 위해 대충대충 영화들을 찍어냈다. <엽기적인 그녀> 등을 제작한 신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몇년 전 기자와 인터뷰하며 “당시 허가받은 영화사가 20개 있었는데, 폭탄이 20개 있었으면 다 폭파시켜야 한국 영화가 산다고 생각했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최근에는 말 많고 탈 많은 배우 김수현 주연의 <리얼>을 두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영화’라는 평가가 나왔다. 얼마 전 이 영화가 OTT에 올라왔으나,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국은 영화천국답게 괴작도 스케일이 크다. 아예 ‘어사일럼’이라는 전문제작사가 있다. 이 회사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개봉 즈음 비슷한 제목과 소재의 짝퉁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악명 높다.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본뜬 <트랜스모퍼>라는 영화 때문에 이 회사를 알게 됐다. 모 DVD 쇼핑몰에서 이 영화를 1900원 떨이할 때 호기심에 구매했으나, 괴작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조악한 특수효과, 어설픈 연기에 질려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다빈치 코드>를 겨냥한 <다빈치 트레져>, <퍼시픽 림>을 본뜬 <아틀란틱 림>, <킹콩>을 베낀 <킹:잃어버린 세계> 등 리스트도 화려하다.

한때 국내에서 붐이 일었던 199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에도 괴이한 작품이 많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명작과 엇비슷한 제목인데, 수준은 발끝에도 못 미치는 영화들을 적지 않게 봤다. 다른 영화 장면을 재활용한 영화를 보고 질겁했던 경험도 몇번 있다.

이런 괴작들은 유해하다. 단순히 못 만들어서가 아니다. 관객들을 속여 돈이나 벌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진 데다, 진지하게 영화를 만들려는 창작자들의 열의를 꺾기 때문이다. 망작들이 잘될 수록 영화산업은 더 왜곡되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에선 괴작보다 더 괴상망측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내란을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한 괴작 다큐멘터리들이 극장에서 버젓이 상영 중이다. 최근 한 제작진이 만든 <힘내라 대한민국>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두 달여 시차로 개봉했는데, 만듦새가 어떻게 되든 물 들어올 때 노 젓겠다는 상업적 의도가 훤히 보인다.

특히 한때 유명했던 모 피디가 만든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는 윤석열이 직접 관람해 더 논란이 됐다. 감옥에 있어야 할 내란 수괴가 자신의 부정선거 망상을 부추기는 영화를 극장에서 뻔뻔하게 관람하는 장면은 여느 괴작영화 설정보다 괴이하다. 졸다가 웃다가 극장을 나오는 윤석열을 향해 ‘윤어게인’을 외친 강경 지지층들은 괴작의 조연들로 손색이 없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화 애호가로서 괴작 같은 현실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란보다 무서운 광란의 시대. 온전한 정신, 평온한 일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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