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인 ‘압도적인’ 기력으로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대국을 모두 끝낸 ‘바둑 여제’의 얼굴에는 후련함보다 피곤함이 더 많이 묻어났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아 팬들의 우려를 자아냈던 최정 9단은, 그럼에도 활짝 웃음과 동시에 13살 차이 나는 어린 후배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최정은 10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내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8회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3번기 제3국에서 155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이로서 최정은 종합 전적 2승1패로 여자기성전 정상에 올랐다. 2~4회 3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6회 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던 최정은 지난 대회에서 김은지 9단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이번 우승으로 통산 5번째 여자기성전 우승을 맛봤다.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앞서 1국을 스미레에게 내줘 기선을 제압당했던 최정은 2국에서 3시간20분 혈투 끝에 간신히 역전승을 거두고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날은 2시간30분 만에 비교적 무난하게 승리를 챙겼다. 대국 중반 스미레의 실수를 틈타 순식간에 우변의 백 대마를 몰살시킨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대국 후 취재진과 따로 만난 최정은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예전 같지 않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부터 ‘번아웃’을 호소해왔던 최정은 올해 대국수를 대폭 줄였다. 심지어 여자바둑리그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매년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 온 최정이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전환점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반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부진했다. 그 과정에서 오랜기간 지켜오던 여자랭킹 1위 자리도 뒤를 맹추격해오는 김은지 9단에게 잠시 내주기도 했다.
팬들도, 그리고 본인도 당혹스러울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최정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정은 “나이가 들면서 몸도 그렇고 머리도 예전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부분”이라며 “최대한 오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오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피하기보다 인정하고, 거기에 맞선다는 얘기였다.
1996년생인 최정은 ‘바둑기사’로는 슬슬 노장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우승으로 최정은 여전히 자신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다만 김은지나 스미레 같은 어린 후배들의 추격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최정은 “쫓아오는 것이 부담은 되지만, 그렇다고 크지는 않다. 둘 다 너무 바둑을 잘 둔다”고 했다. 특히 지난 3월 한국기원으로 이적해 불과 9개월 만에 결승에 올라 자신과 대적한, 13살 차이가 나는 스미레에 대해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을 많이 했다. 지금은 진짜 잘 둔다”며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예측이 안된다”고 혀를 내둘렀다.
올해를 “성적면에서는 좋지 않았지만, 인생면에서는 배우는게 많은 해였던 것 같다”고 정리한 최정은 팬들이 우려하는 건강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최근에 성적이 안 좋아서 그랬던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최정을 좋아하는 팬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소식이다. 바둑 여제는 아직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