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은 몫을 나누는 게 아니라 쌓는 것이다

2025-09-17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문자와 함께 시작됐다. 비옥한 땅에 도시가 세워지고 국가로 발전했다. 수메르인은 문자로 지식과 기술을 기록했다. 문자는 경제의 초석도 다졌다. 사람들은 농작물을 신전에 맡기고 점토판에 기록했다. 이 점토판은 미래 수확물을 담보로 현재 물건을 얻는 '어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즉시 교환이 어려웠던 물물교환 시대에 점토판은 '신뢰의 증표'였다.

이 증표 덕분에 시장 규모는 커졌고 경제는 활성화됐다. 점토판은 오늘날의 계약서, 영수증, 차용증 격이다. '신용'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시작이었다. 이후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은 채무와 이자율을 명시했다. 이는 신용을 국가가 보장하고 규제하는 첫 사례다. 리디아 왕국은 금속화폐를 만들어 화폐와 신용이 하나임을 정립했다. 고대 그리스는 사원에 돈을 맡기고 빌리는 금융 시스템의 초석을 만들었다.

이처럼 최초 문명부터 지금까지 '신용'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신뢰의 증표로 쓰였다. 사람들은 미래를 담보로 빚을 내고 성실하게 갚아왔다. 신용은 사회적 관계까지 만들었다.

이런 신용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고신용자의 신용 점수 혜택 일부를 떼어내 저신용자에게 주자"는 대통령의 발언이 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발언은 신용 시스템의 훼손을 넘어 신용 사회 자체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더한다.

신용은 수십년간 쌓아온 경제활동 노력의 결과물이다. 고신용자들이 낮은 금리의 대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시장의 보상이다. 노력의 대가를 희생시켜 저신용자에게 혜택을 주자는 것은 신용 가치를 무너뜨리고 성실함에 깊은 박탈감까지 안겨주는 것이다.

'고신용자는 부자, 저신용자는 서민'이라는 '이분법'도 문제다. 신용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항목은 돈을 제때 갚아나가는 '성실함'이다. 따라서 고소득자 모두가 고신용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출을 받지 않은 고소득자는 신용 점수가 낮은 경우도 적지 않다. 신용 점수를 소득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금리 부담의 근본 원인은 경기 침체와 취약 차주의 상환 능력 부족이 낳은 결과다. 정부가 진정으로 취약계층을 도우려면 서민금융을 대폭 늘리거나 채무 조정을 돕는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신용'은 개인의 노력이자, 사회의 공공재다. 고신용자들이 성실하게 쌓아온 신뢰를 아무런 대가 없이 이용한다면 '무임승차'에 불과하다. 신용의 본질은 약속이다. 누구의 몫을 나눌지 논할 것이 아니라, '기회'를 통해 신용 사회를 더 탄탄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 1929년 미국의 대공황,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무분별한 '신용남발'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금융기관은 신용과 관계없이 인간의 탐욕과 광기를 부추겼고 그 결과 신용의 본질을 파괴하는 비극을 낳았다.

신용은 결코 갈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서민 지원은 노력한 사람의 몫을 빼앗아 나누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신용을 쌓고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포용적 신용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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