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미디어] 주황 뒤집개의 몰락

2024-09-26

큰집에는 아주 오래된 뒤집개가 있다. 일반 뒤집개보다 좀 더 크고 단단하며 눈에 띄는 선명한 주황색이 특징이다. 아, 여기서 말하는 뒤집개는 전을 부칠 때 쓰는 도구다. 같은 뒤집개가 아주 오래 사용된 건지, 매번 똑같은 뒤집개를 구매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명절이면 언제나 그 뒤집개가 등장했다. 뒤집개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집 여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내 기억 속 최초의 뒤집개 주인은 작은고모였다. 큰고모가 시집가고 작은고모가 뒤집개를 물려받은 것이다. 작은고모가 시집을 가니 사촌 언니가 물려받았고 사촌 언니가 시집가니 친언니가 물려받았다. 이후 나와 언니, 사촌 동생이 번갈아 가며 뒤집개 주인을 자청했다. 누구 하나 시킨 적은 없었다. 되려 할머니는 주방이 좁으니 나가 있으라고 고함을 쳤지만, 내가 뒤집개를 손에 쥔 이유는 엄마가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아마, 언니와 사촌 동생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엄마는 종일 잠을 잤다. 죽은 사람 밥상 차리다 산 사람이 죽어가는 꼴이다. 차례 음식 만들기는 최소 2주 전, ‘장 보기’부터 시작된다. 돔, 가자미, 장어, 전복, 소라, 문어 등 차례상에 메인으로 올라가는 해산물은 미리 구매해 준비한다. 말려야 하는 생선은 말리는데, 가끔 덜 말랐거나 날씨 탓에 구더기가 생기면 다른 대체품을 찾아야 한다. 음식을 만드는 날에는 아침 일찍 큰집에 모인다. 오전엔 재료 준비에 집중하고 점심쯤 나물을 만들고 전을 굽는다. 그렇게 전이 마무리되면 한쪽에선 생선찜을 올리고 식혜를 만든다. 그렇게 음식은 저녁쯤 마무리된다. 그나마 우리는 큰 집이 가까워 다행이지만, 멀리서 오는 숙모는 그 고생을 헤아릴 수가 없다. 음식을 하는 것뿐인가. 더 괴로운 건 설거지다. 셀 수 없는 그릇 수에 허리는 전기 타듯 아려온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차례를 지내는 시간은 추석 당일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지난 설, 차례 간소화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앞으로 차례상에는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과일, 다과 종류만을 올리기로 합의했다. 가족 구성원 모두 이 복잡하고 가성비 떨어지는 행위를 그만두는 게 맞다 판단한 것이다. 이제 메인 요리사들도 나이가 들어 팔, 다리, 장기까지 멀쩡한 곳이 없으니 결정은 아주 쉬웠다. 그렇게 주황 뒤집개는 차례 음식과 함께 몰락했다. 다시 그것을 손에 쥐는 일은 없으리라. 역사적인 순간, 나는 힘차게 박수쳤다. 비로소 찾은 양손의 자유였다.

새로 맞은 추석은 아주 산뜻했다. 추석 당일 평소처럼 일어나 큰집에 갔고, 과일과 다과로 조촐하게 차례상을 차렸다. 과일 옆에는 요즘 유행하는 두바이 초콜릿도 놓았다. 혀가 아리도록 달다가도 고소한 초콜릿 맛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좀 놀랐을 것이다. 이후 우리는 시장에서 사 온 시래깃국으로 속을 뜨뜻하게 데우고 낮잠을 실컷 잔 뒤 단골 카페로 가 브런치를 먹었다. 바질 향 가득한 바질 햄 치즈 샌드위치에 고소한 아메리카노. 몸도 마음도 아주 여유로운 한때였다.

이미 명절 풍경이 바뀐 지 오래다. 차례를 지내는 방식은 가족마다 다르며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거나 각자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들도 많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책에는 시선의 10주기 제사를 위해 온 가족이 하와이에 모인다. 하와이는 시선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그들은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수집해 오기로 한다. 그 아름다운 섬을 거닐며 그들의 엄마, 그리고 할머니를 추억한다.

물론 명절 차례와 제사는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목적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기억하는 행위라면 ‘시선으로부터’와 같은 방법도 굉장히 멋질 것 같다. 꼭 근사한 곳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 그저 다 함께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를 추억할 만한 물건, 음식 또는 그것이 없다면 올해를 보내며 인상 깊었던 순간을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이야기가 끝나면 힘찬 박수와 한호를 보내는 거다. 그럼 아마 제사상은 더 알록달록해지고 오고 가는 이야기들 속에 추억은 선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차례는 서로를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명절이면 돌아오는 특별한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진보화 청년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