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 ⑯ 반구대 이재걸이 죽었다.”

2024-09-06

모든 이야기는 이재걸, 손방수 부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국창 김소희 선생의 고명딸 박윤초 명창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로 확정한 날이었다. 암각화 진입로 입구에 있는 민물고기 요릿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반구대에 처음 간 날이다. 극영화 <광대>의 촬영지로 소개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열 명쯤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당시엔 바닥에 앉아서 먹는 구조였다. 상차림은 정갈했지만, 반찬의 모양새가 꾀죄죄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바닥에 앉았다가 섰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퍼 날랐다. 국도 밥상 앞에서 끓이며 직접 퍼 줬다. 땅딸막하고 뚱뚱한 여자는 다부져 보였다. 그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았다. 밥상 앞에서 우리가 대화할 겨를이 없을 만큼이었다.

계절마다 산과 들에서 반찬거리를 채취한다고 했다. 채취한 모든 식물은 찌를 담근다고 했다. 그래서 보기엔 좀 그래 보여도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들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몇 년간 말을 안 했다고 했다. 원래 말이 없었는데 살기 위해 말을 한다고 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저 작은 남자는 남편이라고 했다. 남편은 머리를 다쳐 말이 조금 어눌한 것이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물고기는 청정 대곡천(지금은 반구천으로 부른다.)에서 잡았다고 했다. 민물고기라도 절대 디스토마가 없다고 했다. 아버지 때부터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물고기를 밤에 몰래 가서 도둑질해 와야 한다고 했다. 수자원공사와 울주군은 민물 어업권을 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물 어업권이 없는 데가 울산이라고 했다. 군청에서는 원주민이라는 증명서를 가져오고 배를 등록해 오라고 했다 한다. 원주민이라는 대법원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어업권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배를 등록했다. 그래도 어업권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한 시간 반쯤 있는 동안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그땐 참 시끄럽다고 생각했고, 거북했다. 그때가 2018년 5월 16일 수요일 오후 너덧 시쯤 무렵이었다. <광대> 헌팅차 이후로도 몇 차례 올라갔다. 그때마다 그곳에서 식사했고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모든 손님에게 그 말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이 유수 같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땐 그녀가 성가셨다. <광대>가 엎어진 뒤로 다시 반구대에 가지 않았다. 이제야 공감하게 된 것이지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이유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억울하니까, 그 억울함이 도무지 풀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제발 좀 들어달라고, 제발 좀 공감해 달라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그랬던 것이었다.

다시 반구대를 찾았던 때는 코로나가 창궐해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한편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이동시간이 줄어드니 그 자리를 메울 때까지 한동안 시간이 남아돌았다.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양팔에 강아지를 끼고 거실 창으로 파스텔 색상의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과 함께 유유자적하다가 그 여자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말의 내용이 내 삶과 이질적이었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떠올랐다. 기억나는 말들을 재구성했다. 쓸데없이 붙은 지방 덩어리들을 떼어내고 뼈와 근육 덩어리로만 재조합하기를 반복했다. 며칠 동안 곱씹고 곱씹다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후로도 며칠을 빈둥거리다가 오후 8시쯤 됐을까, 갑자기 일어나 제법 컴컴할 때 반구대로 향했다.

불쑥 들어가 다큐 좀 찍어야겠다고 말했다. 도둑질. 민물 어업권. 원한에 따른 주민들의 신고. 가족의 배신. 그 내용들에 호기심이 생긴다고 했다. 말할 기회가 필요했다면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협조하겠다고 했다. 손바닥만 한 캠코더를 가지고 올라갔다가 그날 밤에 바로 고화질의 캠코더를 구매했고, 캠코더가 온 날부터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올라갔다. 알고 보니 남편이 학성 이가(家)로 우리 집안 사람이고, 그녀 남편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먼 6촌 사이라고 했다.

극영화 <광대>, 그리고 손방수와 이재걸

2010년쯤까지만 해도 난 얼리어댑터였다. 초등학교 때 삼성의 첫 개인용 컴퓨터였던 SPC-1000이 출시되자마자 가졌고, 소니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가졌다. 중학교 때 처음 출시된 경량 파나소닉 비디오카메라와 처음 출시된 니콘 초소형 똑딱이 필름 카메라를 가졌고,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 태광 에로이카 턴테이블 세트를 가졌다. 국내에 출시되지도 않은 세계 최초의 크리에이티브사(社) MP3P를 가졌고, 국내에 처음 출시된 삼성 디지털카메라도 가졌다. 핸드폰과 MP3P가 결합한 세계 최초의 삼성 핸드폰을 가졌고, 이후로도 소형 전자기기에 ‘최초’, ‘첫’이 붙은 건 무조건 가져야 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고, 2010년쯤부터 내 주머니 사정이 디지털 기기의 출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은 게 아니라면 되려 물건을 오래 쓰게 됐다.

20, 30대는 음악이 없으면 살 수 없었다. 영화가 아니었으면 난 작곡을 업으로 하며 살았을 거다. MP3P 기능이 있는 그 최초의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다가 패닉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를 듣고 기괴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직 볕이 따가운 초가을 무렵 낮이었고, 압구정 현대아파트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가사의 모든 내용이 이미지로 그려지는 노래였다. 멈춰 서서 핸드폰의 액정으로 노래 제목을 확인하고 가수를 확인했다. 지금도 버즘나무 아래에서 은색 핸드폰 모서리가 햇빛에 반사된 그 작은 빛 뭉치 때문에 눈앞이 네거티브 필름처럼 보이는 듯한 착시가 일어난다. <광대>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어릿광대’가 절벽에 매달려서 살아보겠다고 웃으면서 울면서 춤추는 장면에서부터다.

난 여전히 <광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모습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영화 안팎의 세상 사람들을 경험할수록 내가 점점 더 광대와 동일화되고 있음을 느끼고 시나리오는 더 농축된다. 엎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난 그 광대를 그 여자와 그의 남편에게서도 발견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손방수이고, 그녀 남편의 이름은 이재걸이다. 선택했건 선택을 당했건 그들은 절벽 끝에 매달려 무서워 죽겠는데 웃어야 하고, 울고 싶은데 깔깔거려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칼질을 당했든 칼날을 쥔 채 제 손과 제 가슴을 스스로 난도질하든 그들은 아프게 살면서 아프다고 말도 하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약도 못 바르고 살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들어주고 공감하며 기록하는 것밖에 없었다.

안다. 그들의 말이 전적으로 사실이나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어떤 건 억지고, 어떤 건 과장됐으며, 어떤 것은 이들이 가진 의심을 상상하다가 사실화한 것도 많을 거라는 것. 하지만 그 이유가 너무나도 억울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릿광대’처럼 절규하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한 편이라고 안심하게 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 대한 내 마음은 카메라가 돌아갈 때 냉정해지는 때를 빼곤 진심이다.

두 부부는 날 만난 뒤부터, 정확히 그들을 키노-아이로 기록하기 시작한 때부터 조금 바뀌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언제 공개될지 모르지만 영원히 남게 될 영상으로 기록된다는 점에서 안도한 것 같고, 다시 불쑥 들어올 카메라 렌즈를 대비하며 이런저런 서사를 정리하고 구성하면서 객관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이 했던 것처럼 이들의 아픔을 누군가는 알아주고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가 치유의 시작이 됐기 때문이다.

손방수는 보이는 것보다 무척 영특한 여자다. 그녀가 도시에서 태어나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만 있었다면,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가난하더라도 가부장적인 고립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스무 살에 결혼해 스물한 살에, 스물세 살에 두 아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스무 살 남짓한 아들이 사고로 죽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녀는 제법 번듯하게 사회에, 국가에 크게 기여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평소에 핸드폰으로 촬영했다는 이미지들을 보면 사물의 핵심을 잡아낼 줄 아는 놀라운 능력이 보인다. 카메라를 주고 찍어오라면 기술적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상황에 대한 맥락을 읽어낼 줄 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부족해도 기승전결은 완성형이다. 그래서 그녀의 나이 50대 초반에 내가 재직 중이던 학교에 입학하게 했다. 올해 초에 난 학교를 그만뒀지만, 그녀는 이제 졸업반이다. 정말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카메라를 맡기게 되면서 반구대에 올라가는 수도 줄었다. 꼭 필요한 때만 올라가게 됐다.

손방수 남편, 이재걸

이재걸은 1959년 울산 삼산동에서 태어났다. 뻘밭이었던 삼산동에 땅이 좀 있었던 집안이라 삼산동이 개발되면서 보상금을 제법 받은 벼락부자의 둘째 아들이었다. 개인택시 운전사였던 그는 한 마디로 (손방수의 말에 따르면) 난봉꾼이었다. 술 좋아해, 담배 좋아해, 노름 좋아해, 여자 좋아해, 유흥 좋아해. 그녀가 첫선을 보던 날, 양가 상견례 날, 결혼식 날 등 서너 번 보고 결혼한 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때에도, 아이를 둘 낳았을 때도 이재걸은 밖에서 겉돌았다.

성질은 ‘개떡’ 같았다.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버럭버럭 화를 내고, 술만 마시면 위아래와 앞뒤가 없어서 경찰서도 여러 차례 들락거렸으며, 감정의 기복도 커서 비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가 손방수의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반구대로 올라왔고, 어린 부인의 부모를 위해 땅을 사주고 집을 지어줬으며, 부인의 형제들도 외면하는 부모의 병시중을 들었다. 택시 운행을 마치고 낯선 반구대로 올라와 제일 먼저 누워 있는 장모에게 가 인사를 했고, 가래가 끓어 숨을 못 쉬면 빨대를 꽂아 직접 가래를 빨아내 뱉어내곤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했다. 체구는 어린 부인보다 작았어도 마음은 제법 큰 구석이 있어서 부인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버럭 화를 냈다가 조용히 청을 들어줬다고 한다.

6년간 대곡리 이장을 하고 2년 쉬었다가 다시 6년을 더 해서 12년 동안 이장을 지냈다. 술에 취해 억울한 일을 한 번 겪고는 두 번 다시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그즈음 술 좋아하는 처남과 한밤중에 반구대로 올라왔다가 집 앞에서 말다툼하다가 힘 좋은 처남에게 떠밀려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를 돌에 부닥치면서 피를 많이 흘렸는데, 그때부터 말이 어눌하고 목소리 크기가 조절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처음 본 때는 상태가 크게 좋아졌을 때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듯 나도 그가 늘 술에 취해 있는 줄 알았다.

처음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한 때는 카메라를 통해서였다. 그는 내가 먼 친척이라고 처음부터 편하게 말을 놨다(카메라 앞에선 말을 높였다). 잡아 온 물고기를 커다란 솥에 넣고 제 몸만 한 주걱으로 휘휘 저으면서 중탕을 하면서였는데, 그때 그가 한 말이 기억난다. “가업을 이어온 원주민으로 법원에서 증명을 해줬는데 왜 어업권을 안 주는지 모르겠어요. 밤마다 몰래 가서 물고기를 잡아 오는데, 멧돼지도 나오지요, 고라니도 나오지요, 어둡지요, 배는 작지요. 목숨을 걸고 하고 있어요. 제가 이제 60이 넘었어요. 어업권 좀 주세요. 평생 도둑놈으로 살다가 갈 순 없잖아요. 제발 어업권 좀 주세요.”

벼락부자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택시 운전사였던 그가 부인을 위해 반구대를 올라와 도둑놈으로 살면서 친형제로부터, 친부모로부터, 부인의 형제로부터, 마을 주민들로부터, 관으로부터 이래저래 한이 많이 맺힌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21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난 소형 캠코더를 손방수에게 줬고, 그녀는 서울로 오가면서 모든 과정을 찍어 내게 전했다. 결론은 스트레스와 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촬영본을 보면 처음엔 제법 살이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병치레를 거치고 날 때마다 작은 몸이 더 작아졌다가 조금 부족하게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2021년 사진전 때문에 반구대 주민들을 촬영하고 다니면서 이재걸의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그때 찍었던 네 컷 가운데 한 컷을 영정사진으로 썼다.

맥박이 멈췄대요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 8월 31일 정오 무렵에 동강병원으로 갔다. 며칠 전 품질 좋은 투명한 가방을 85퍼센트쯤 할인된 가격으로 사서 잘 들고 다니는데, 몰래 촬영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액션캠을 넣고 병원으로 들어가 이재걸을 찍었다. 촬영본을 보면 소리도 그렇고 장면도 그렇고, 엉망진창이기 짝이 없지만 중환자실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방수는 나를 멀리서 온 시누이라고 했다. 이재걸의 누운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미에 이런저런 호스를 꽂아두고 있어서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구나, 하는 이질감.

한 달 가까이 안마기에 누워서 잠시간씩 눈을 붙이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날 손방수에게 엄청나게 짜증을 냈다. 중환자실이 정확하게 어느 병동 몇 층이냐, 주차장은 정확히 어디 있는 것이냐. 왜냐하면 지도상으로 중환자실은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손방수가 말하는 신관도 없었다. 주차장도 여기저기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손방수는 계속 신관, 주차장 2층, 그런 이야기만 했다. 높은 데 못 올라가는데 구름다리 같은 걸 건너야 했고, 고통스러움에 화가 치밀어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손방수에게 이것저것 물을 게 있으니 내 작업실로 가자고 했다. 촬영감독이 촬영 준비 중이었다. 면회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함께 걸어오는데 햄버거 가게가 보였다. 병원 앞 편의점과 병원 주차장의 이 햄버거집은 돈을 갈고리로 긁겠다 싶었다. 밥을 먹었냐고 물으니 대충 먹었다고 한다. 햄버거를 두 세트 샀다. 2만 원이 훌쩍 넘었다. 며칠 전 이재걸이 병시중 드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손방수에게 햄버거를 하나 사 먹으라고 했다 한다. 너무 비싸서 못 먹었는데……라며 고맙다고 받았다. 그리곤 옆의 야외휴게소를 가리키더니 “며칠 전에 남편이 여기서 저를 휠체어에 태우고 밀어줬어요. 계속 누워 있어서 근육이 다 풀렸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힘이 펄펄 나더라고요. 이 무거운 나를……. 그러더니 다음날 중환자실로 갔어요.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 날 밤 10시쯤에 전화가 왔다.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땀을 뻘뻘 흘린 뒤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가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흔적이 있었다. 기분이 싸했다. 전화를 걸자마자 말한다. “맥박이 멈췄대요. 사망 선고한다고 오래요. 가는 길이에요.” 검은색 옷을 허겁지겁 입고 예의 그 투명한 가방에 카메라를 챙겨 넣었다. 그녀는 바로 전에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카메라 전원을 켰다.

주검을 처음 봤다. 그런데 배 쪽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소호흡기는 사망선고 직후에 떼 내는 것이고, 호흡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거라 했다. 이재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다른 중환자의 마음이 어땠을까. 미안하지만 그녀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다큐멘터리에 쓰지 못하겠지만. 의사는 형식적으로 말했겠지만 근엄했다. 정중하고 근엄한 그 모습이 고마웠다. “2024년 9월 1일 밤 10시 15분, 이재걸 님 사망하셨습니다.”

울 줄 모르는 여자와 죽은 뒤에도 장난 가득한 남자

생전 이재걸은 장난기가 많았다. 그리고 상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다. 출상하는 날 아침에 난 앞에 앉은 이에게 라면 국물을 부어주다가 쏟았고, 그는 주차장에서 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그의’ 장난에 허둥지둥했다. 떠나면서 마지막 장난기를 부렸나 보다.

손방수는 울 줄 모른다. 아픔이 많았고, 너무 많이 참고 살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도 말의 높낮이에 변화가 없다. 그런데 그녀가 울었다. 아들보다도 더 적은 뼛가루 양을 보고 처음으로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오는 금요일은 아들의 기일이다. 손방수가 말했다. “언이 아빠. 우야 손 잡고 편안하게 잘 가. 우야, 아빠 잘 모시고 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이재걸 님. 당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면하소서.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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