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대한민국은 아이들을 다른 나라로 입양 보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혼혈아동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는 명목하에 해외입양을 추진했다. 휴전 첫해인 1953년 혼혈아동 4명을 미국으로 보낸 게 시작이었다. 이듬해 ‘한국아동양호회’(대한사회복지회 전신)라는 입양기관이 만들어졌고, 미국 농부였던 해리 홀트가 1956년 ‘홀트양자회’를 설립해 해외입양을 이끌었다.
198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아이를 입양시켰다. 1985년 한 해에만 8837명을 보냈다. 많은 아이들이 해외로 갈 수 있었던 데는 ‘대리 입양’ 제도가 있었다. 입양 부모가 한국에 오지 않고도 대리인을 통해 입양이 가능했다. 입양 절차가 깐깐한 서구 국가들에 한국은 손쉽게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저 가난이 미안했던 부모들은 ‘부자 나라로 가면 잘 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차별과 학대에 부닥친 입양아들이 적지 않았다. 입양을 보내는 데 급급하다보니 서류 조작과 바꿔치기도 서슴지 않았다. 1984년 김유리씨도 부모의 동의 없이 프랑스로 강제 입양된 피해자다. 무정하고 무도하게, 이 나라는 아이들을 떠나보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3월 국제입양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결론냈다.
“여러분을 태어난 나라에서 기르지 못해 책임을 느낍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로 초청한 29명의 해외입양인들에게 공식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 사과는 김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 1988년 해외동포 간담회에서 마주한 학생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고 한다. 당시 김리나씨는 물었다. “당신 나라는 우리를 낯선 나라로 팔았다. 지금도 수많은 아이가 팔려오고 있다. 정치지도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통령이 ‘나라의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해외입양은 없애지 못했다. 그사이 해외입양 아이는 17만명에 달한다. 마침내 정부가 해외입양을 단계적으로 중단해 2029년부터는 전면 중단키로 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가 품어야 한다. 이번 선언이 부끄러운 진실을 마주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고통받은 입양아들을 보듬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