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노자, 비상계엄 그리고 한강

2024-12-12

마지막이다. 달력도 한 장 남았다. 세상의 모든 일, 어김없이 끝을 향해 간다. 작년부터 말석에 앉아 배우던 <노자>도 완독이 코앞이다. 마지막 81장을 앞두고 이 문장을 다시 만났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빠트리는 법이 없다. 어디 꼭 그런가. 세상에 죄와 벌이 무성하지만, 죄만 벌어지고 그에 합당한 벌은 어디에 있는가. 왜 세상은 잔인한 자들이 활개치는가. 왜 악독한 자들을 내버려 두는가.

수십 년 전, 광주를 덮친 비극만 해도 그랬다. 학살의 주범들은 그러고도 떵떵거리며 오래 살더라. 지금도 후손들은 은닉한 쩐으로 잘 먹고 잘 살더라. 쳇, 하늘의 그물을 믿으라고? 저 문장의 효력을 의심했었다. 공중에 아득한 눈발 성글게 날릴 때 하늘은 그물을 슬쩍 보여주는가. 그중에 가장 큰 눈송이 골라 혀끝에 얹으며 중얼거리기를, 고작 연약한 한해살이풀이나 꾸짖듯 흠뻑 덮어씌우고, 자란 죄밖에 없는 나무의 밑동이나 옥죄는 건가요?

아뿔싸, 이는 나의 짧은 소견에 불과했으니. 콩밥 먹다가 흐지부지 풀려난 그들을 단죄한 판결문보다도 더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들로 죄는 벌을 받게 하였으니. 이제 그들의 업(業)은 언어의 감옥에 영원히 갇혀버렸으니. 말 없는 하늘은 결국 이렇게 ‘소년’을 보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늦은 밤 노벨상 중계를 시청하다가 퍼뜩 깨달았으니.

“폐하, 존경하는 노벨상 수상자, 신사 숙녀 여러분. 한강의 글에서는 흰색과 빨간색, 두 가지 색이 만납니다. 그녀의 많은 책에서 흰색은 화자와 세상 사이에 보호막을 그리는 눈(雪)이지만, 흰색은 또한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 빛이 희미해지며 죽은 자들의 그림자는 벽 위를 계속 맴돕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끝나지 않습니다. 디어(Dear) 한강….”(노벨 문학상 시상 연설)

어쩌나, 소설의 내용이 다시 현실이라니! 비상계엄이라니! 하지만 모든 건 대단원을 준비한다. 끝내고 다시 시작한다. 사시(四時)는 명확하고 지금은 겨울이다. 봄을 기다리는 바깥은 충분히 춥다. 이 날씨를 덥다고 우기지 말라. 안 넘어지려는 자, 더 크게 자빠뜨리는 게 하늘의 도(道)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