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 타작을 하고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도 마치고 나니 모처럼 한가롭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아내는 혼자 새벽 산책을 다녀오더니 말했다. 따로 할 일도 없으니 마을 경로당 옆 공터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마대 자루로 담아다 텃밭에 넣자고. 이맘때면 해마다 하던 일. 우리는 아침 요기를 한 후 마대 자루 몇 개를 손수레에 싣고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는 벚나무·느티나무·산수유나무·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뒤섞여 쌓여 있었다. 화학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온 우리는 매년 낙엽을 실어다 텃밭에 넣어 농작물을 가꾸었다. 요즘 농민 중에 우리처럼 낙엽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식물과 함께할 때 느끼는 행복
인간과 식물이 교감하기 때문
낙엽에도 신비로운 이치 담겨

우리가 낙엽을 거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어떤 생태학자의 글 때문이었다. 식물들은 낙엽 한장을 버릴 때도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고 아주 공을 많이 들여서 버린다는 것. 가을이 되어 떨어뜨릴 나뭇잎에 갖은 정성을 들여 만든 식이 유황을 비롯한 면역물질을 가득 쌓은 다음 땅에 떨어뜨린다는 것. 이렇게 떨어진 잎들은 썩어 거름이 되는데, 거름 속에 들어 있는 유황 성분이 땅을 소독하여 해로운 균이 번식하지 못하게 하고, 작물에 해를 끼치는 벌레 알도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지 않은가.
공터에 있는 낙엽을 마대 자루에 담아 손수레 가득 싣고 집으로 오는데, 아내가 뒤따라오며 말했다. “나무는 마지막까지 자기 것을 다 내어주는군요.” 그렇다. 가을이 되어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낙엽의 몸짓이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성스러운가.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버리며 그것을 생의 소멸로만 읽어온 우리의 사색이야말로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얼마 전 월트 휘트먼의 『풀잎』을 다시 읽었다. ‘탁 트인 길의 노래’라는 시에서, 휘트먼은 자신이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떠올랐다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묻고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건대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
시인의 자문자답을 읽으며 문득 드는 생각. 그는 나무에게도 인간처럼 의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실제로 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 속에 살아가는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공동체 사람들은 나무의 의식이 ‘제재소 너머까지도’ 이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즉 나무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집은 물론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식물학자들도 지구 생명의 원천인 식물을 ‘녹색 영혼’을 지닌 존재들로 본다.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둔, 감정이 있는 생명체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물은 장님이자 귀머거리, 벙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인간의 감정을 알 수 있는 대단히 예민한 생명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피터 톰킨스, 『식물의 정신세계』)
식물이 인간의 감정까지 알아채는 생명체라면, 인간이 지구 생명들과 영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 평소 나는 왜 인간이 식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사는 일이 괴롭고 힘들 때 나무들이 우거진 산을 오르거나 풀들이 무성한 들판을 걷지 않던가. 피터 톰킨스는 “우리가 식물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물들이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다고? 식물을 지구에서 활용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으로만 여기는 이들은 식물과 인간, 인간과 식물이 영적으로 소통한다는 말을 귓등으로만 듣고 말리라. 나는 빛바랜 낙엽을 마대 자루에 담아오면서 낙엽이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우리를 쓰레기 취급하지 않고 땅을 이롭게 할 거름으로 사용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우리는 손수레에 실어온 낙엽을 텃밭에 쏟아붓고 나서 두 차례나 더 공터로 가서 낙엽을 실어왔다. 텃밭에 부은 낙엽을 골고루 펴고 있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러자 옆집 은행나무의 덜 떨어졌던 금빛 잎들이 흩날렸다. 나는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잎들을 빗자루로 쓸어 밭으로 밀어 넣었다. 또 한차례 바람이 솨솨솨 불자 나뭇잎들이 축복처럼 날아와 내 머리 위로 흩날렸다.
고진하 목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