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생님을 내려놓습니다

2024-12-04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행은 무심코 지나간 날에 대한 다시 만남의 기회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얼마전 가족들과 함께 경남 통영을 여행하다가 그런 과거와 만났습니다. 바로 윤이상 선생입니다.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 한려수도를 끼고 있고 통영만 일대와 그 앞의 거제도 일원은 우리나라의 손꼽는 청정해역으로서 굴과 미역 등 각종 해산물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그 앞의 섬들을 바라보면 문득 유명한 한국화가인 고 남천 송수남씨의 그림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그만큼 통영만과 통영은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그와는 다른 멋진 물의 고향이자 아기자기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곳입니다. 통영은 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기에 기념관, 미술관도 많고요. 그런 통영을 갔다가 문득 윤이상 기념관을 가게 된 것인데요. 문득이라고 하면 원래는 계획에 없다가 갑자기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서울에 있으면서 통영에 대해서는 2010년 3월에 개관한 윤이상 기념관이 그의 이념문제로 이름을 무슨 테마기념관으로 했다는 소식, 2017년에 윤이상 탄생 100돌을 맞아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부인이 독일방문 때 베를린에 있는 그의 묘소에 동백나무를 심었다는 소식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맛있는 해산물을 먹자며 통영을 찾았다가 통영시내에 윤이상 기념관을 보고는 예정없이 방문하게 된 것이지요.

윤이상(1917∼1995년) 선생으 세계적인 작곡가지요. 통영시내 한 가운데라 할 도천동에 있는 윤이상 기념관은 그의 음악을 보여주는 곳으로, 지상 2층 연면적 867.5m² 규모로 2층의 전시관에는 윤이상 선생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눈으로 알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저야 윤이상 선생에 대해 많이 알고 있기에 전시관 2층을 대충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이 기념관의 팀장이란 분이 나와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서야 전말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2017년에 윤이상 선생의 주검이 통영으로 모셔졌고, 선생이 살던 베를린의 집이 이곳에 다시 옮겨져 세워졌으며, 그의 유물들이 대거 전시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품은 베를린 하우스라고 하는 별도의 건물에 주로 있었습니다. 마침 당일이 휴관일이어서 문을 닫고 있었는데 팀장님의 배려로 윤이상의 베를린 하우스(집)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독일 베를린시 교외의 자크로우어 키르히베크 47에서 살았습니다. 우거진 전나무 사이에 반지하실이 있는 2층집인데 1층엔 응접실, 2층엔 작업실과 침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집을 KBS 기자 시절 1984년 3월과 1988년 12월 두 번 방문해서 취재했습니다. 통영의 베를린하우스에 들어가 보니 낯익은 소파가 눈에 들어옵니다. 벽에는 우리나라 민화 그림 두 점이 걸려있더군요. 윤 선생의 베를린 집 응접실 그대로였습니다.

84년의 첫 만남은 거실에서만 이뤄졌습니다. 당시 갑작스럽게 대담하게 되었는데 1967년의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이후 한국 언론과의 첫 회견이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그 사건 이후의 심경과 자신의 음악세계, 한국에 관한 생각 등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당시는 서울올림픽을 4년 앞둔 때로 윤 선생은 정부에서 음악가로 초청을 해준다면 기꺼이 응하겠는데 연락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 같이 동배를린 사건에 휘말려 우리 문화사에서 실종된 파리의 이응로 화백을 윤이상 선생과 함께 조명하자는 취지로 88년 12월 베를린을 다시 찾았습니다. 때마침 친구 사이였던 전봉초 당시 예총회장이 그 집을 방문해 올림픽 이후 한국이 많이 변했으니, 조국을 위해 음악적 이바지를 하고 고향도 방문하는 게 어떠냐고 하는 권유하는 것을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윤 선생은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현실적으로 정리돼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88년 취재 당시 2층 서재로 올라가다 계단 옆에 고구려 무덤의 백호도(白虎圖) 모사화(模寫畵)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윤 선생의 부인인 이수자 씨는 “그거 보고 싶어서 평양 갔다가 빨갱이로 몰려서 그렇게 혼이 났잖아”라고 하셨습니다. 생전 윤 선생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좋아해 그의 작품이 담긴 레코드 재킷 등에 자주 이런 그림을 사용했습니다.

윤이상 선생과의 대담은 나중에 파리에서의 이응로 선생 취재분과 합쳐져 89년 1월 6일 신년기획 ‘이향에서 본 조국 윤이상, 이응로’라는 제목으로 약 한 시간 동안 방영됐고요, 방영 나흘 뒤 파리의 이응로 선생이 세상을 뜨시어 이 방송은 이응로 선생에게는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그의 입을 통해 예술세계를 한국민들에게 전한 것이 되었고 또 윤 선생으로서도 독일에서의 활약을 물론 통일과 음악의 역할 등에 대해 많은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윤 선생은 북한 측과의 연락을 통해 남북한 통일음악회를 추진했고,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 음악인이 한무대에 서는 감격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94년에는 그의 음악을 소개하는 음악제도 통영에서 열리고 귀국 문제도 본격 추진됐습니다. 그때 마침 일본에 와서 귀국을 고대했지만, 우리 정부와의 최종 협의가 깨지고, 또 북한 측에서도 한국 방문을 막았다는 소문 등 남북한의 갈등으로 고향 방문이 무산되자 크게 낙망했고 건강도 악화해 이듬해인 95년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러고는 저는 윤이상 선생을 사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유품과 유물을 통해 선생을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 선생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72년 뮌헨올림픽을 기해 윤이상 선생이 위촉받아 작곡한 오페라 심청의 공연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덕분이지만, 전시관에는 작곡한 악보는 있는데 그 대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집에는 이 오페라 심청의 원 대본이 있었습니다. 1972년 발행한 것으로 누군가가 저에게 준 것인데 근 반세기 가까이 제가 보관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마침 안내를 해준 팀장께 물어보니 악보는 있는데 대본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올라와서는 곧바로 이 대본집을 윤이상 기념관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윤 선생의 귀한 관련 자료가 저를 통해 마땅히 갈 곳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자 생활을 시작한 70년대 말 누군가가 저에게 준 이 대본집이 윤이상 선생과 긴 인연의 시발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윤이상 선생의 주검도 고향인 통영에 돌아와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안장되어 있고 기념관과 기념사업, 기념음악제도 활발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기에 저로서는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예술세계를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육성으로 한국에 소개했고 심청 대본을 지켰다가 선생 곁으로 보내드린 것으로 작은 보람을 삼고 이제 선생님의 진정한 영면을 빌며 저도 이제 선생님과의 인연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윤이상 선생님

평생 일 많이 하셨고 고초도 많으셨습니다.

이제 다 내려놓으셨지요? 편안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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