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쏠린 세계의 눈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한 경주가 지금, 국제적 관심의 중심에 서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기자가 취재하면서 보여주는 경주의 모습이 스웨덴의 TV화면에서 보는 것은 신선한 즐거움이다. 11월 초까지 6일간 진행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행사에는 21개 회원국 정상 및 각료, 기업인, 언론인, 수행원 및 가족 등 약 2만 명에 달하는 국제 방문객이 경주를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주가 이번 회의의 핵심주제인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AI), 지속 가능한 성장 등 세계 경제의 최전선 의제를 다루는 외교 무대가 되면서, 단순한 관광 도시를 넘어 국제 도시로의 도약이라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국가의 수도가 아닌 경주와 같은 지방도시들이 세계적 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세계적 도시들의 상징성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국가의 수도들이다. 워싱턴, 런던, 베를린, 파리, 로마, 암스테르담. 이름만 불러도 한 나라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적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지구적 행사가 대개 수도에서 열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수도는 국가의 상징이고 세계인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계인의 시선이 언제나 수도에만 쏠리는 것은 아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의 대도시는 금융과 문화 활동의 파장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고, 제네바와 헤이그는 국제기구와 국제사법의 중추로 기능하며 세계에서 파견된 외교관과 언론인이 가장 많은 곳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는다. 얄타와 포츠담, 카사블랑카 같은 이름은 특정 시기의 국제 질서가 어떻게 조정됐는지를 환기시켜 준다. 오늘날에는 스포츠가 도시의 명성을 세계로 확산시킨다. 리버풀과 맨체스터,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는 경기장 안팎의 문화가 결합해 도시 이미지를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보스턴은 마라톤이라는 전통을 시민적 자부심과 세계적 축제로 이어가고 있다. 도시학자들이 국가 경쟁력이 수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결국 경쟁력 있는 도시의 수와 깊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 북방의 스톡홀름과 오슬로는 인구규모로 보면 경주보다 조금 더 크지만, 노벨상이 지닌 상징성과 오랜 외교 경험 덕분에 국제 평화와 분쟁을 조정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1992년부터 1993년 초까지 오슬로에서 비밀 협상이 진전되고 같은 해 9월 워싱턴에서 클린턴이 이스라엘의 라빈총리와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가 함께 서명한 평화협정으로 그 해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면서 외교 도시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2019년 북·미 실무 협상이 스톡홀름에서 열렸고, 2025년 7월에는 미·중 고위급 통상대화가 프랑스 파리에 이어, 스톡홀름에서 진행되며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경주 합의의 밑거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로써 오슬로와 스톡홀름은 '갈등 완화의 중립적 장소'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했다. 이렇듯 수도의 상징성은 행정 중심을 넘어 세계 외교의 무대를 뒷받침하는 힘으로 확장된다.
도시경쟁력과 성공사례
국제도시를 비교하는 지표들도 이런 흐름을 확인시킨다. 이른바 모리 지수는 도시의 흡인력을 여러 차원에서 동시에 살핀다. '글로벌 파워 시티 인덱스(GPCI) 2024'에서 1위는 런던이 차지하고, 서울은 종합 6위로 평가됐다. 눈에 띄는 것은 뉴욕이 수도 워싱턴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공항과 철도, 도로 같은 이동의 편의가 기본을 이루고, 생활 여건이 쾌적해야 하며, 문화 교류의 장이 넓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환경의 질 뿐 아니라, 기업 활동과 대학, 연구소가 활력을 띠어 지식과 기술의 생태계를 이룰 때 도시의 경쟁력은 커진다. 다시 말해 접근성과 생활 여건뿐 아니라, 문화 교류와 환경, 그리고 경제와 연구 개발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호응할 때 그 도시는 세계가 찾는 목적지가 된다. 도시가 국제도시로 도약하는데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숙박시설이다.
지방 도시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있어 숙박 시설은 더 이상 단순히 잠을 자는 기능적 인프라가 아니다. 이는 지역의 고유한 색채와 문화를 체험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방문객의 체류 가치와 도시 정체성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의 마치야(町家) 보존 정책은 이 전략의 성공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교토시는 전통 목조 가옥인 교마치야의 무분별한 멸실을 막기 위해 시 정부 차원에서 해체를 엄격히 규제하고 역사상과 건축적 미를 결합하는 상세한 개조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규제가 단순한 보존에 그치지 않고, 민간이 마치야를 숙박 시설로 재생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경제적 타당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 덕분에 방문객들은 평범한 호텔을 이용하는 대신, 전통 가옥에서 교토 특유의 주거 문화와 역사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델은 도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고가치의 문화 관광 수익을 창출함으로써, 규제와 경제적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도시 정책의 모범을 보여준다. 한국의 지방 도시들 역시 잠재된 고유 건축 문화(예: 한옥, 지역 특색 가옥)를 단순한 전시물이 아닌, 체험형 문화 숙박 공간으로 적극 육성하여 도시의 매력을 다층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밴쿠버는 또 다른 해법을 보여준다. 2010년 동계올림픽 선수촌은 대회 종료와 함께 사라지는 임시 시설이 아니었다. 에너지 효율과 공공 공간이 결합된 친환경 주거 단지로 전환되면서, 도시의 평소 삶을 개선하는 자산이 되었다. 경주 역시 APEC 기간에 가동한 임시 숙소나 교통 운영을 친환경 상시 모델로 바꾸는 접근이 필요하다. 한옥 숙박의 고유성,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푸드 시스템, K-뷰티와 편의시설의 체험 같은 요소를 결합해 '탄소 중립과 문화, 그리고 전통미와 맛이 공존하는 역사 도시'라는 뚜렷한 이미지를 축적할 수 있다.
경주와 다른 지방도시는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나
경주가 처해 있는 현실은 도전과 기회가 동시에 존재하는 국면이다. 신라 천년의 시간을 품은 유적과 풍부한 관광 자원, 그리고 APEC 정상회의라는 무대가 겹치며 세계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도시 브랜드의 관점에서 이런 계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세계적 행사의 성공은 행사진행능력, 볼거리와 놀거리, 먹을거리의 풍성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통은 또 하나의 관문이다. 국제선 직결이 어려운 경우에는 국내의 거점 공항과 도시를 연결하는 고빈도 교통망을 확실히 마련해 이동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공항과 역, 숙소, 도심과 관광지 사이의 라스트마일 연결은 대형 행사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 관광 수요를 위해서도 세심하게 다듬어야 한다. 낮에 체험할 문화유적의 접근편의성 뿐 아니라 저녁 시간의 문화 프로그램과 야간 경제를 뒷받침하는 대중교통의 배차, 안전한 도보 동선, 다국어 안내와 정보 제공은 방문자의 체감 품질을 좌우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도시의 고유한 문화와 창조 산업이 상시 루틴을 이루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특정 시기에만 불이 켜지는 이벤트형 도시가 아니라, 음악과 전시, 축제와 야간 관광이 계절의 흐름에 맞춰 이어지는 도시가 방문자의 재방문을 이끌고 시민의 일상 만족도를 높인다. 이런 점에서 도시 간 역할 분담도 중요하다. 부산은 해양과 MICE, 인천은 항공과 물류, 광주는 문화 산업과 창작 생태계처럼 각자의 강점을 분명히 하고,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 인근 위성 도시가 한 몸처럼 협력하는 연합형 개최 모델을 정착시키면 한 도시의 과부하를 줄이면서도 국가 전체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
천년자산을 시스템적 역량으로
스톡홀름과 오슬로의 경험은 도시의 국제적 위상이 단순히 경제 규모나 인구 수에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인구 70만에서 90만에 불과한 이들 도시는 노벨상이라는 세계적 이벤트를 매년 성공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국제평화 및 지식 교류의 중심지라는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이는 '스톡홀름 선언'이나 '오슬로 협정'처럼 도시의 이름이 글로벌 담론의 핵심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 도시의 성공은 단순한 노벨상이라는 킬러 콘텐츠를 넘어, 그것을 뒷받침하는 견고한 실질 역량과 다양한 숙박시설, 그리고 소통가능한 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묵을 수 있는 유스호스텔 시설부터 다양한 문화적 거주공간을 보존한 고풍스런 건물을 활용한 작은호텔, 대형 국제회의 참가들을 흡수할 고급 호텔시설까지 다양한 가격대로 도시를 촘촘하게 연결시켜 놓았다. 또한 어디를 가도 영어가 통하고, 정중하게 맞이하는 시민적 역량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는 완성된다.
경주는 이제 단순히 역사 유산을 보존하는 도시를 넘어, 미래 기술과 아시아·태평양 협력의 실무 무대로 역할을 넓혀야 한다. 동아시아는 물론 아랍과도 교류했던 천년의 자산을 토대로, 믿을 수 있는 인프라(교통·숙박·통신)와 탄탄한 운영 시스템(의전·통역·보안·미디어)을 함께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말로만 '이미지'를 쌓는 대신, 현장에서 바로 작동하는 소프트 파워와 실행력을 묶어내야 한다. 시민들 또한 평상시 국제적 시민의 역량을 갖추기 위한 노력과 자세가 필요하다. 그럴 때 경주의 이름이 세계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