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장관 국빈방문도 수행 못하게 한 국감…비밀 유출 공방이나 벌였다[현장에서]

2024-10-10

지난 7일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냥 대통령궁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간 정상회담. 양국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수교 75년 만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관계를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13년 만에 이뤄진 한국 대통령의 국빈방문에서 양국 정상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정상회담장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아세안 외교를 총괄하는 주무부처를 이끄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배석하지 않은 것이다. 조 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외교부 국정감사에 참석하는 중이었다.

정상회담에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등이 배석했다. 장호진 외교안보특별보좌관과 이상화 주필리핀 대사도 배석했지만, 조 장관이 자리에 없는 건 아무래도 어색한 그림이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같은 이유로 윤 대통령의 필리핀 국빈방문을 수행하지 못했다. 우리 산업부와 필리핀 환경천연자원부·통상산업부는 이번에 ‘핵심 원자재 공급망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이 현장에도 주무부처 수장인 안 장관은 참석하지 못했다.

국정감사에 국빈방문을 넘어서는 중요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 기능에서 핵심이며, 국회는 국정감사에서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활용해 정부의 정책을 검증한다. 국정감사를 의정 활동의 꽃으로 비유하는 이유다. 피감 기관의 수장이 국정감사에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중요한 외교적 행사에 대해서도 예외나 양해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반복되는 거야(巨野)의 폭주나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 등 이제는 정부와 국회 간의 갈등이 감정싸움처럼 비칠 지경이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달 조 장관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서울에서 열리는 ‘2024인공지능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고위급회의’ 참석을 위해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 불참하겠다고 하자, 야당은 “국회와 헌법을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외교부는 이미 10여일 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측에 국무위원 대리출석 양해를 요청했고, 민주당 원내대표실도 이를 사전 승인한 터였다.

결국 대정부질문 일정을 저녁으로 미뤄 조 장관도 참석했지만, 우리나라가 주재하는 고위급 외교 행사의 중요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상황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비난부터 하고 나서는 야당의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외교적 사안까지 국내 정쟁의 소재로 삼는 행태가 반복되는 게 더 안타까웠다.

상대국에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외교부 장관의 국빈방문 수행 불참이었지만, 그러고선 진행된 국정감사의 ‘수준’은 더 허탈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 단절을 선언하며 대남 핵 공격을 위협하고, 한국의 외교안보 환경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미국 대선이 코앞이지만 정작 국정감사에서 이런 현안은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았다.

대신 1년도 더 지난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전 당시 외교부가 판세 분석을 잘못 했다는 내용의 3급 비밀 문서를 두고 공방이 이어졌다. 철지난 이야기이기도 하려니와,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이 비밀 문서를 통째로 공개해 논란을 자초했다. 국정감사장 대형 스크린에 비밀로 분류된 정부의 공문을 그대로 띄운 건 본말이 전도된 자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외교만큼 초당적 지지가 필요한 분야도 없다.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에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외교가 희생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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