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사할린한인을 버렸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황제는 라디오로 일본의 패전을 공포했다. 사할린의 한인 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던 린 땅에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준 소비에트 군인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이들은 러시아 군인들의 손에서 검은 빵 한 덩어리를 기쁘게 받으며 '해방의 빵'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뼈저린 실망이었다.
1945년 8월 25일 소비에트군은 가라후토의 항구를 봉쇄하고 남사할린의 주요 도시인 도요하라를 해방시켰고, 그곳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데 스테판이 썼듯이 그 전야인 8월 24일 러시아 상륙 부대가 오도마리에 상륙했다.
그날 이 항구의 선창의 풍경은 모든 목격자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2만 명 이상의 일본 피난민들이 항구를 가득 채워 살아있는 인간의 바다로 만들었다. 모든 학교들과 사원들, 공공건물들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군중들이 있는 해안가에는 섬을 떠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부조차 태울 수 없는 증기선, 항만용 소형 증기선, 어선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약 3만여 명의 전 일본 제국 국민들이 사할린에 남아야 했다.
참모부는 피난민들이 예전의 거주지로 귀환하여 예전과 같은 기업과 기관의 일터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인들은 순순히 이를 따랐지만 한국인들은 귀국을 요구하면서 저항했다. 군사 행동 중 일부 주민들이 북쪽 지역에서 남쪽 지역으로 도주했다.
부분적으로 오도마리산과 도요하라 산에 약 3만 명 이상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산속으로 올라갔다. 피난민은 모두 6만 4천 명으로 추산된다.
박승의 가족의 피난 길: 避難しましょう! (피난 가자)
니토이 촌에는 전투가 없었다. 단지 소련 비행기가 폭탄을 촌의 광장에 투하했다. 두 식구는 우리 집 앞에 있는 지하실에 숨어서 소련군을 기다렸다. 사이렌 소리가 그치면 호기심이 많은 우리들은 지하실 문을 열고 거리를 살펴봤다. 광장의 집들이 파괴되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우리 식구는 부랴 부랴 짐을 챙겨서 피난을 떠났다. 피난 길을 떠나게 되면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다. 특히 아이들이. 어린 나이의 누나와 나는 배낭을 메고 부모, 친구들과 걸어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일본 관청이 준 화물차를 타고 고노마이(현 노워알렉산드롭가)를 도착했을 무렵 귀환선 2척은 이미 오도마리(현 코르사코브)항을 떠났다. 우리 차례를 3주나 기다렸으나 선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배들은 소련 해군의 폭격에 침몰했다. 우리가 불안한 기대와 혼란 상태에 잠겨 있는 사이에 소련군은 북위 50도의 국경 지대에서 남으로 진격했다. 이렇게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들은 소련 당국의 지시에 따라 2주일 후에 니토이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우리가 살던 집들은 파괴되지 않았다.
해방된 남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2만 3498명이었고 대부분이 일본인들에 의해 젊은 나이에 가족, 친지들과 헤어진 사람들이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이를 동정했지만 전쟁으로 파괴된 농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1946년 2월 2일 소련의 사할린 인민위원회는 한국인을 포함한 전 일본 국민에게 임시 신분증과 거주증을 1946년 4월 1일부터 발급한다고 공표했다. 이것이 억류되어 있던 사할린 모든 주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새로운 권력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한인들은 완전히 다른 것을 원했다. 이들은 예전의 억압자인 일본인들보다 더 먼저 고국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규모 정책'은 이들의 기대를 가혹하게 기만했다.
1946~49년 소련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간 협력 과정에서 약 2만 6065명의 북한 사람들이 (주로 어업을 위해) 사할린으로 동원되었다. 당시 약 1만 4395명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여러 가지 이유로 남게 된 북한 노동자들은 사할린 주의 주민들로 합류됐다.
일본인들의 본국 송환으로 생긴 남사할린의 노동력 공백을 채우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전국에 조직적 동원을 선포했다. 1946~1949년 대륙으로부터 45만 명의 이주민들이 왔다. 이들 중에는 1937년에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한인들도 있었다.
해방된 남부 사할린에 있는 한인들이 러시아어를 모르는 문맹자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통역원, 교사, 한인 주민 노동 부서 감독관들로 일해오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된 최초 시기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계속된 충원이 이루어졌다.
사할린에 버려진 1세대의 한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잃고 타지에서 살아야 했다. 이들은 러시아어를 모르고 서양 문화에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적지 않은 시련을 거쳤다. 이들에게는 모든 민족과 인민들에게 평등의 원칙을 공포한 나라에서 국적 없이 오랜 기간을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다.
1950년대 한인들이 새로운 조건속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문제는 적지 않았다. 전후 초기 시기의 특징인 다수의 무직자들과 극도로 악화된 식료품 상황으로 특히 쌀과 대두를 중심으로 한 식량부족이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농업이나 어업, 산업 조합에 편입될 때 제한이 있었고 도시의 주민들이 촌락으로 이주를 하는 경우에는 조합원으로 존속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조직들의 대표들에게는 한인들에게 주택과 농업용 건물을 짓고 수리할 때 지급하는 금전 대부를 제공하는 것이 금지됐다.
국적 없이 살고 있는 젊은 한인들은 대부분의 고등 교육 기관과 중등 특수 교육 기관에 입학할 수 없었다. 일본의 가라후토에 강제로 빼앗긴 성과 이름을 찾게 하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1951년 8월 18일 수치에 따르면 사할린주에는 한인 4만 2916명이 살고 있었고 그중 남자는 2만 2427명, 여자는 1만 777명, 16세 이하 아동은 9712명이었다. 이미 1950년대 초에 한인들 다수가 소련 국적 취득 신청을 했다. 접수는 사할린주 행정기관들의 제안으로 시작됐고 1952년 5월 6일 소련 내각회의 결정에 준하여 진행됐다.
예외 규정으로 소련 국적자의 소개소가 없을 경우 지역의 한인 주민 (무국적자)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온 자의 청원서를 검토할 허가를 줬다. 하지만 직장의 평가서와 사할린 지역 공산당 집행 위원회의 상응하는 평가서를 제출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정부의 조건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통계가 나왔다: 1008명이 소련 국적 취득 희망을 밝혔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이후 고국으로 돌아갈 때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련 국적 취득을 기피했다. 6346명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국적자로 1만 5909 명은 무국적자 (전 일본 국적)로 남았다.
[ 글 = 박승의 전 사할린 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