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걸음과 멈춤 사이

2025-12-03

시간의 문앞에서

먼 길이다. 긴 길이다. 그래도 걸을 것이다. 한 사내가 먼저 지나간 발자취를 더듬어 걸을 것이다. 오래된 흙길 위에 남았을 자국들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먼지만 남았을 그 길을 나는 밟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앉고 누웠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하늘을 볼 것이다. 발은 미래로 나아가지만 마음은 오래된 시간을 되짚어 나갈 것이다.

룸비니. 아기가 태어났다. 사람의 아들이었고 왕의 아들이었다. 성 안에서 자랐다. 평안했고 안전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성 밖에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보았다. 또 어느 수행자의 등을 보았다. 그는 인간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성을 넘었다. 세상으로 나왔다. 인간의 삶은 괴로움 위에 놓인다. 그도 그 위에 발을 디뎠다. 그의 걸음은 괴로움 위에서 그대로 길이 되었다. 모든 길의 첫 자리는 언제나 괴로움이다.

보드가야. 그는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 오래 앉았다. 앉는 일은 멈추는 일이다. 인간은 서두르며 살지만 어느 순간에는 멈추어야 한다. 멈춤 속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바람이 지나가고 잎이 흔들렸을 것이다. 나무의 향과 먼 곳에서 시작된 모든 소리가 고요가 되어 그를 둘러쌌을 것이다. 그는 그 고요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보았다 했다. 깨달음은 다시 보는 일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본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일이다. 그는 그날 눈을 떴다. 나는 그가 앉았던 보드가야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성지라 부른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인간의 말이다. 진리는 흙과 같다. 밟히고 흔들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 흙 위에 기도의 발자국이 쌓인다. 그곳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가 보았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다르지 않다. 사람은 여전히 태어나고 울고 웃고 미워하고 사랑하다 죽는다. 바뀌는 것은 이름뿐이고 흐르는 것은 시간뿐이다.

사르나트. 들판에서 그는 말했다. 네 가지의 진리를 말했다.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 그 괴로움을 멈추는 길이 있다. 말은 짧았다. 울림은 길었다. 세상은 괴로움으로 엮인 그물이다. 인간은 그 안에서 몸부림친다. 그의 말은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끌어안았다. 삶의 바탕은 괴로움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살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쿠시나가르. 나무 아래에 그가 누웠다.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낮이 지나고 밤이 지나갔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몸은 흙으로 돌아갔고 숨은 바람이 되었다. 열반은 기적이 아니다. 질서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일어난다고 그는 말했다. 그도 그 연기(緣起)의 질서 위에 누웠다. 인간의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그의 죽음도 그랬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나는 떠난다. 그 길을 밟기 위해 떠난다. 그러나 떠나기 전부터 길은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의 먼지와 열기와 발바닥의 통증 속에서 내가 마주할 것은 그의 완성된 깨달음이 아니라 한 인간이 품었던 물음일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 나를 되묻는 일이다. 몸은 지칠 것이고 마음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흔들림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떠나기 전의 밤은 무겁고 조용하다. 그가 들었던 고요도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그 고요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걸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멈출 줄도 알아야한다. 걸음은 사유이고 멈춤은 고요다. 이 둘이 스칠 때 진실이 잠시 지나간다. 그 한순간의 스침을 위해 나는 떠난다. 그 길은 멀다. 그러나 길은 다 닳지 않았다. 일정대로라면 이 글이 종이위에 잉크로 말라갈 즈음 나는 룸비니에 서 있을 것이다. 이번 생에도 나는 늦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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