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 광화문 한복판에 유림대표 최익현이 도끼를 놓고 엎드렸다. 상소단 백여 명이 부복했다. 왜(倭)와 수교하려면 자신의 목을 치라는 유림의 결기였다. 같은 시각, 강화도에서는 일본 함대가 발사한 함포가 하늘에서 터졌고, 섬을 향해 회선포가 난사됐다. 접견대관 신헌(申櫶)이 조약 원문을 고치려들자 전권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발한 명령이었다. 오로지 성리학적 논리에 목을 맨 최익현과 유생들이 화륜선과 회선포의 위력을 목도했을 리 없다.
그로부터 140년 후인 2016년 12월,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인용되자 광화문은 들끓었다. 연인원 1000만 명이 내지른 함성에 외신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중국을 견제하는 사드 배치 지연 문제가 극동 안보에 초미의 관심사였기에 미국은 핵항모 칼빈슨호를 서해로 급파했다. 칼빈슨호는 전략폭격기의 호위를 받으며 권력의 진공상태가 된 남한 해협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한 달 뒤면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는 정권 이양기에 북한의 오판을 우려한 오바마 정부의 마지막 배려였다.
명분과 논리 싸움에 이골난 나라
트럼프 패권주의에 대비책 묘연
병정과 상무가 자강 외교의 두 축
반명과 반윤 투쟁에 짓밟힌 미래
정확히 8년이 지났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광화문은 다시 함성과 깃발로 가득 찼다. 필자가 한 달 전 제안한 그 생뚱맞은 문학축제라면 좋으련만 창과 칼이 난무하는 망국(亡國)의 춤판이 벌어졌다. 대통령 놀이를 했다는 김 여사를 의금부로 보내야 한다는 절규는 새로울 것이 없는데, 벼랑에 내몰린 야당 지도자와 지지 집단의 울부짖음이 광장에 나뒹굴었다. 때마침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대학 시국성명서가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온 터라 야당의 전의는 더욱 살벌해졌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준 윤 대통령은 전쟁 획책으로 몰렸고, 대북 전단 살포를 묵인했다는 국방장관은 탄핵 리스트에 새로 올랐다.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북한군 500명이 전사했다는 기사도 떴다. 2기 트럼프 정부가 예고되었건만 한국은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다. 국가안보를 내팽개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어제 판결이 난 위증교사 사건 외에 3건이 더 남았다. 만약, 한국에 정권의 진공상태가 다시 발생한다면 미국은 칼빈슨호를 급파할까? 집안싸움을 지켜주려 미국이 선뜻 나설까? 미국이 신경 쓸 일은 더욱 많아졌다. 중동 전쟁은 끝이 안 보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위험선을 넘었다. 미국산 미사일이 작렬하는 가운데, 핵사용도 불사한다는 모스크바의 경고도 나왔다. 안보를 손익으로 셈하는 트럼프 당선인은 설령 한국에 미 함대를 파견해도 현금을 요구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내부 싸움판을 키워가는 정치권은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지 절박하게 묻고 싶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강 지형이 요동친다. 원한과 반목이 켜켜이 쌓였다. 바이든 정부만 해도 북·중·러 견제정책은 일관됐다. 트럼프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패권주의, 국익 우선주의, 보호주의에 집착한 트럼프의 머릿속엔 중국이 최대 적이다. 미국의 거친 행보로 취약한 한·중·일 협력체제는 쉬 망가진다. 북·러 밀착이 중국 고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방관 자세로 돌아설 것이다. 하노이 회차(回車)로 트럼프는 김정은의 아집을 꺾지 못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무대 뒤에서 은밀히 중국과 거래할 수도 없고, 북한에 유입되는 러시아의 최신 무기 기술을 막을 방법도 묘연하다. 게다가, 김정은과의 거래에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가 거론된다면 한국으로선 낭패다. 노무현 정부 당시 등거리 외교와 균형자론이 부상한 적이 있다. 패권주의로 치닫는 트럼프에게 그것은 얄미운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복안이 있는가? 내정에 죽을 쑤는 윤 대통령이 정신을 수습해 대미 외교 로드맵을 정비할 수 있을까. 2기 트럼프가 내년 초부터 당장 한국산 수출품에 10% 보호관세, 중국산에는 초고율관세 60%를 때린다면 한국경제는 미·중 틈바구니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쉴 게 틀림없다.
미국, 영국, 독일, 청과 일련의 수호조약을 맺었던 1880년대 초에도 척사론 만인소가 전국을 울렸다. 제물포 앞바다에 서양 군함이 들락거렸다. 약관 27세 유길준은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言事疏, 1883). 자주 외교는 곧 내정(內政)에 달렸다고. “내수가 혼란하면 상대국들이 업신여기고 결국 병정(兵政)과 상무(商務)가 무너진다!” 27세 청년에게도 보였던 자강의 두 기둥, 국방과 교역은 바로 2기 트럼프 대비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내정, 외교, 자강으로 나아가는 길은 왜 이리도 어지러운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문화와 상품마다 K자를 붙이는 한국의 내부 실상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다. 나라는 반명(反明)과 반윤(反尹) 연대로 이미 두 조각났다. 한 해가 저물어도 나라 미래는 새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이게 당신들의 나라냐?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