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잘한 광해군, 내치 소홀 혼군 낙인

2025-02-26

정치학을 공부해온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역사의 희생양은 광해군(1575~1641·사진)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슬픔을 안으로 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는 늘 고독하고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그는 영민했다.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젊은 나이에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왜병 물리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왕위 등극 이후 최우선으로 추진한 꿈은 전쟁으로 황폐화한 경제를 재건하고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며 문화를 창달하는 것이었다.

정치가로서 광해군의 제일 업적은 외교였다. 대륙에서 명나라와 청나라 세력이 교체되던 미묘한 시기에 국경을 튼튼히 함은 물론 탁월한 외교술로 국가안보를 강화했고, 일본과 기유조약(1609)을 체결해 양국 관계를 안정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그가 퇴위한 이후 청나라가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외환이 없었으며, 국방과 외교가 조선 500년 동안 가장 튼튼했다. 광해군의 폐위 배경에는 대청 외교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그의 외교에 대한 청나라의 음모가 작용했다. 폭군이어서 폐위했다는 교서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외치에 몰두하면서 내치를 소홀히 했다. 그만의 실수는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에는 직신(直臣)이 없었고, 보신과 영달에만 눈이 멀어 왕을 혼군(昏君)으로 몰아갔다. 계모(인목대비)에게 불효한 것은 사실이고,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죽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 사람만의 책임이며, 조선에서 형제를 죽인 왕이 어디 그뿐이었나.

정치란 모름지기 안을 다스리고 밖을 봐야 한다. 가정이고, 조직이고, 나라고 따질 것 없이 안이 화목하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광해군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왜 이토록 더해지는 걸까.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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