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남성복 추구하는 68세…“쇼를 상상하면 무당 된 기분”

2024-09-20

국내 남성복 1세대 디자이너 장광효

“디자이너로서 모든 걸 다 해봤어요. 원도 한도 없어요. 그냥 옷 하는 게 즐거워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감사한 인생이지요.” 어둡고 칙칙한 검은 양복에 스포츠용 흰 면양말을 신고 출근하던 한국의 샐러리맨들에게 멋과 스타일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68). 그는 국내 남성복 1세대 디자이너로 ‘최초’ 타이틀을 많이 달았다. 최초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 컬렉션 개최, 최초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 파리 컬렉션 참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여전히 옷을 만들고 매년 패션쇼를 여는 현역 디자이너라는 사실이다.

지난 9월 4일 서울 서소문성지 하늘광장에선 ‘장광효 카루소’의 2025년 봄·여름 컬렉션 패션쇼가 열렸다. 쇼는 저녁 6시가 넘어 시작됐지만 한낮의 열기를 품은 야외 쇼 장은 부채질이 필요할 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600여 관객을 진짜 후끈 달아오르게 한 것은 68세 현역 디자이너가 준비한 낭만과 감동의 무대였다.

몸에 잘 맞도록 디자인 된 정통 테일러드 수트를 시작으로 다양한 파스텔톤 컬러의 캐주얼 재킷과 바지, 세일러복, 트렌치 코트 등이 뒤를 이었다. “남성복 맞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과감하게 커팅된 의상들은 섹시했고, 풍성한 퍼프소매와 프릴이 달린 의상들은 우아했다.

이번 쇼 의상은 유난히 색이 화려했어요.

“미대생이었으니까 컬러에 선입견이 없어요. 마음대로 색을 주무르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내가 비주얼이 좀 세죠.(웃음) 남성복은 자칫 잘못하면 양복점 옷처럼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거든요. 여성복 못지않게 남성복도 캐주얼하고 웨어러블 했으면, 여자가 입어도 좋을 만큼 예뻤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에요.”

남성복 쇼인데 늘 ‘스커트’가 등장합니다.

“스코틀랜드 민속의상인 킬트는 스커트지만 남성 옷이죠. 나는 그걸 꾸준히 변형시켜 왔어요. 바지 만으로는 실루엣이나 디자인에 한계가 있으니까. 너무 뻔한 것 말고, 늘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어요.”

소방차 승마바지, 서태지 스타일 만들어

고교 시절부터 백화점에서 잘 만든 비싼 옷을 사 입거나 동대문 시장 보세 매장에서 개성 있는 수입 옷을 사 입던 장광효는 의상학과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4년제 대학의 의상학과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결국 그는 미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의상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해 기어이 옷 만들기를 공부했다. 대학원에서는 산업디자인과에서 직물을 공부했다. 첫 직장도 여성복을 만들어야 하는 반도패션 대신 남성복을 만들 수 있는 캠브리지를 택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국내 남성복 1세대 디자이너가 됐고, 1987년 문을 연 ‘장광효 카루소’는 국내 남성복의 대명사로 유명해졌다. 1987년 같은 해 데뷔한 ‘소방차’가 히트 시킨 ‘승마바지’도,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미소년 이미지를 살린 귀여운 느낌의 유니섹스 룩도 그의 작품이다. 국민가수 조용필부터 신인 댄스그룹까지 장광효 카루소의 옷을 입는 게 최고로 여겨지던 때였다.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장광효 카루소 옷을 마다하는 사람은 재수생 시절부터 친구인 손석희 앵커가 유일하지 않을까.

요즘 남성복 쇼에선 수트를 볼 수 없어요.

“테일러드 수트 만들기가 어려우니까 신인 디자이너들은 쉬운 것부터 하고 싶겠죠.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쇼인데 동대문 시장이나 인터넷 쇼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주얼 의상만 수두룩하니 안타깝죠. 옷감이 싸구려인 것은 이해해요. 돈이 없으니까. 차라리 30벌 만들 비용으로 15벌만 만들면서 좋은 옷감과 디테일에 더 신경 쓰면 어떨까, 많이 아쉽죠.”

그는 “요즘 손바느질 하는 수트 장인들이 사라지고 있어 큰일”이라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어서 안 하려 하고, 나처럼 꾸준히 남성복을 하면서 수트를 만드는 사람은 적고, 옷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입 브랜드를 선호하니까 수트 장인들이 설 자리가 없어요.” 지난 봄 서울패션위크 때 그 역시 설 자리를 잃을 뻔했다. 메인 쇼에서 사실상 퇴출됐기 때문이다. ‘매출이 적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이유였다.

지난 봄에는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한창 때는 전국에 매장이 50개나 됐지만 지금은 오프라인 매장 하나 없으니 ‘장광효 망한 거 아니냐’고들 하죠.(웃음) 연 매출 1000억을 할 땐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시켜 서서 먹었어요. 얼굴이 시커멓고 덥지도 않은데 땀이 줄줄 났죠. 젊었으니까 버텼지 지금 같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잘나갔던 예전의 내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건강이나 스트레스나 그만큼 대가를 치렀던 것을 아니까 마음을 비운 거예요. 매장도 다 정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지금은 (본인 소유 청담동 5층 빌딩에서) 맞춤 매장과 공방만 운영하니 마음은 편하지만 매출은 적을 수밖에요. 하지만 ‘장광효 카루소’의 역사를 매출로만 평가할 순 없죠.”

한때 전국 매장 50개, 건강 생각해 줄여

패션 관계자들은 이번 패션쇼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피날레 장면을 꼽는다. 이번 쇼는 선배 디자이너인 박윤수의 ‘빅 팍’ 여성복 컬렉션과 함께 열렸는데 1부 장광효 카루소, 2부 빅 팍 쇼가 모두 끝나고 피날레 무대에 선 두 디자이너는 나란히 서서 사방을 채운 관객석 중 한쪽을 향해 가장 먼저 인사를 했다. 바로 대한민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한혜자·설윤형 등이 앉은 자리다. 청년들처럼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를 입은 두 디자이너가 선배 디자이너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순간, K패션의 장구한 스토리가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고 관객들 사이에선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쇼 마지막에 선배 디자이너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1주일에 한 번씩 명동에 있는 선배 디자이너들 매장을 구경하면서 꿈을 키웠죠.(웃음) 나보다 앞선 사람들을 보면서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역사죠. 그런데 서울패션위크를 주관하는 서울시로부터 ‘매출 없는 나이 든 디자이너들은 나가라’는 말을 들으니 억울했죠. 공무원들끼리 행사를 치를 게 아니라 패션산업 전체를 잘 아는 사람이 운영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많아요.”

그는 서울시가 초대하는 메인 쇼가 아니어도 앞으로 체력이 허락하는 한 패션쇼를 계속 열 계획이다. 1992년 ‘SFAA 서울컬렉션’ 쇼부터 올해까지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쇼를 연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쇼를 상상할 때 스스로 무당이 된 것 같다”고 했다. 1000명 이상이 참가하는 모델 오디션에서 30명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맞는 옷을 정하고 스타일링까지 하려면 무대 위 장면을 잘 예측해야 한다. 이런 그의 상상력과 눈썰미는 차승원·유지태·현빈·장기용·변우석 같은 될성부른 남자 모델을 콕콕 집어 무대에 세우고, 그들이 배우로서 스타가 될 것까지 예견하곤 한다. 장광효 카루소가 남자 모델들의 사관학교이자 스타가 되는 관문으로 꼽히는 이유다.

‘선생님’보다 ‘장쌤’이라는 호칭이 익숙할 만큼 친근한 비결이 있나요.

“2005년 MBC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했을 때 생긴 별명이죠. 처음에는 순진하고 덜떨어진 그 캐릭터가 참 싫었는데(웃음), 지금 생각해 보니 세상 사는 게 별 것 아니더군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맘 편히 건강하게 사는 게 제일이에요. 남 미워할 일 없으면 잠도 잘 와요.(웃음) 하고 싶은 건 다 해봤으니 이젠 다 내려놓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80세까지만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이 나는 딱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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