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당시 여수·순천은 우리가 생각하던 한려수도가 아니었다. 여수(麗水)는 인구 15만5000명이 거주하는 곳으로 남로당원의 숫자는 70~80명 정도였으며 순천(順天)의 인구는 15만 명이었다. 이 무렵 제주 4·3사건으로 좌익에 대한 공포가 높아진 상황에서 미군정에 의한 국방경비대의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국방경비대 정보처장 백선엽(白善燁)은 남로당의 첩자들을 노출해야 군부를 정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의 사주로 발생했지만
국가 전복을 도모한 혁명은 아냐
5400명 넘게 죽은 논쟁적인 사건
민족적 비극으로 풀어야 할 과제

당시 14연대의 연대장은 오동기(吳東起) 소령이었다. 오동기는 반찬에 들어가는 고춧가루가 빨간 물감을 들인 톱밥인 것을 보자 송호성(宋虎聲) 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공개 입찰로 바꾸었다. 그 뒤 송호성은 육군총사령관에 올랐으나 독직 사건이 두려워 한국전쟁 중에 북한으로 넘어갔다. “오동기는 남한 정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좌익 계열의 음모 아래 소련혁명기념일(11월 7일)에 행동을 전개하고자 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오동기를 연루시킨 것은 그가 광복군 출신으로 김구를 추종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9월 28일에 오동기는 구속되었다. 그는 박헌영(朴憲永)의 비서였던 박일원(朴馹遠)에게 심한 고문을 겪었다. 오동기가 군법 재판에서 10년형을 언도받은 뒤 일본군 출신 박승훈(朴勝薰) 중령이 14연대장에 부임해왔다. 연대장이 구속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14연대 1대대는 제주도 토벌 작전에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자 10월 19일에 제14연대의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임 상사였던 지창수(池昌洙)를 선두로 한 좌익들은 제주도 출병 환송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16명의 장교를 사살했다. 이들이 봉기할 당초에 추종한 무리는 40여 명이었다. 당시 지창수는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고 병사들을 선동했다. 10월 20일 오전 3시에 여수경찰서를 점령한 반군은 그 수가 2000명으로 증가했다. 양쪽의 교전이 끝나자 반군은 순천경찰서를 점령하고 인민재판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 400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10월 21일 오후 3시에 여수를 점령한 반군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를 진압하려는 군사고문단의 작전은 ‘찾아서 묶어둔 뒤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4F 작전’이었다. 작전의 하수인은 김종원(金宗元)이었다. 그는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채 총살하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梧洞島) 앞바다로 밀어 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니뽄도(日本刀)로 한 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 경북 경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원은 일제 시대에 지원하여 파푸아-뉴기니아에서 절륜한 체력으로 용맹을 떨쳤고 해방과 더불어 국방경비사관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 군부의 선두주자였다. 사건 당시 이 지역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Snake Kim(김창룡)’과 함께 ‘Tiger Kim(백두산 호랑이)’이라는 별명으로 잔혹의 쌍벽을 이루었다. 한국전란 때 그는 한국은행의 금괴를 이송하는 책임자가 될 만큼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 대통령은 그를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격찬했다.
청야(淸野) 작전으로 반군은 종식되었지만 보복과 살육이 전개되었다. 한 여인은 14연대 군인에게 “호박잎 하나 준 죄”로 잡혀갔다. 문중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을 이유로 처형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자들의 국부를 막대기로 쑤시고 군번이 “260×××”로 시작되는 청년들도 처형되었는데 이는 14연대 병력의 군번이 260으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보복 살인 가운데 보도연맹에 대한 살육이 가장 처절했다. 보도연맹은 반공 검사 오제도(吳制道)의 제안으로 1949년 4월 21일에 발의되어 결성된 것으로 정부는 여기에 가입하면 좌익으로서의 전과를 묻지 않고 애국적 국민으로서 포용하기로 약속했다. 그 무렵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라면 시국 강연을 하는 보도연맹(報道聯盟)인 줄로만 알았지, “자수한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게 만들어 잘 보호하고 인도하는 모임” 곧 보도연맹(保導聯盟)으로 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의 아버지도 비료 표를 얻으려 구장이 부르는 자리에 나갔다가 고문을 겪고 평생을 신음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수·순천 사건은 군부 안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이 틀림없으나, 국가 전복을 도모한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의 남로당 잔여 세력은 남도 끝자락에서 연대 병력으로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전복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중대장 김지회(金智會)와 지창수는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 이현상(李鉉相)으로부터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이름으로 질책을 받았다. 이후로 국군 부대의 명칭에는 ‘4’자를 넣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5400여 명이 죽었는데(‘연합신문’ 1949년 6월 18일) 그 가운데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 이 사건은 격동기의 혼란이나 이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민족의 비극이었으며 언제인가는 해원(解寃)해야 할 과제이다. 이 글은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양쪽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사실을 설명할 뿐, 내 주관을 넣지 않았다.(『논어』, “술이부작(述而不作)) 그것은 이 글을 읽고 난 뒤 독자들의 몫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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