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행의 규모가 무섭게 커가는 데도 시중은행은 규제에 발목 잡혀 투자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게 현실입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한 비(非)금융업 시작도 당국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고, 겨우 시작한다고 해도 지켜야 하는 규정에 성장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당국이 강조하는 비이자이익 확대,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는 필요합니다." (금융권 관계자)
금융사들의 숙원 사업인 금산분리 완화 대책이 또 해를 넘기는 모양새다. 금융사들은 유독 금융업에만 적용되는 '이종업 진출 금지' 규칙이 글로벌 경쟁력 약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금융사가 막대한 자금력을 활용해 스타트업 등 소규모 사업체에 상한선 없이 투자한다면, 결국 골목상권을 침해하는 꼴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금산분리는 금융자본인 은행과 산업자본인 기업 간 결합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이 은행은 상호간 주식을 일정 한도 이상 보유할 수 없다는 게 골자다. 이는 금융과 산업자본을 섞이지 않게 함으로써 금융의 사유화를 방지하고, 주주와 고객 간 이해 상충을 예방하는 게 목적이다.
현재 금융지주는 비금융회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수 없으며, 은행과 보험사들은 다른 회사 지분에 15% 이상 출자할 수 없다. 금융사들은 이같은 규제가 너무 엄격한 탓에 유망한 핀테크 기업 투자가 막히거나, 빅테크 금융사들과의 경쟁에서 오히려 역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은행들이 비금융업을 시작하기 위해선 금융당국의 '혁신금융 서비스 샌드박스'를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나온 서비스들이 KB국민은행의 KB리브엠(알뜰폰), 신한은행의 땡겨요(배달앱) 등이다. 하지만 업계는 현재의 샌드박스 제도는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방안이라고 보고 있다. 혁신 금융 서비스에 지정되는 과정이 복잡한 데다, 된다고 하더라도 2년마다 재심사를 거쳐야 사업 영위가 가능하다.
반면 비금융 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도록 금산분리를 완화하면, 은행들은 배달·통신·유통 등 생활 밀착 업종과 부동산, 가상자산 사업 등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비금융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 편의도 높아지고, 은행의 비이자이익 확대 등 경쟁력도 확대될 것"이라며 "또 앞서 은행의 비금융 서비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상공인 상권 침해 등 우려에 대한 실제 영향은 제한적이다"이라고 설명했다.
금산분리 완화 논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김주현 전 금융위원장은 2022년 취임과 동시에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출범하고 금산분리 규제 장벽을 허물고자 했다. 이를 통해 당국 관계자들은 지난해 8월 금산분리 규제 완화와 관련해 구체적인 방안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돌연 무기한 연기됐다. 은행의 자금력으로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할 경우 시장 혼란이 가중될 것이란 의견에 무게가 실려서다.
한 차례 논의가 지나간 뒤 올해 6월 금융위의 '금융회사 자회사의 투자 제한 완화'를 검토하겠다는 공언으로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다시 불이 붙었다. 당시 김 전 위원장은 지금은 드론이 날아다니고 전자 장비가 많은 시대인데 맨날 총검술 해 봤자 뭐하겠느냐"면서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경쟁력 가지려면, 첨단 기술 능력과 의사가 있으면 하게 해줘야 한다"며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끝내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퇴임하게 됐다.
하지만 규제 완화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금융 혁신 바통을 이어받은 김병환 위원장은 '낡은 규제' 철폐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올해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금산분리 규제 완화' 추진에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금산분리 완화 실행 방안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는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의 지적에 "기존에 검토해 놓은 것들이 쌓여있는데 종합적으로 낼지 아니면 상황에 따라 필요한 규제부터 풀지 고민해 보겠다"며 "금산분리 완화에 동의하는 만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