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열린책들
‘서양 문명’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기원해 타 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형성된 순수 유럽적이고 백인 혈통적인 문명일까.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역사가로 현재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고전 고고학 교수인 지은이는 서양‧서양 문명에 대한 이러한 기존 관념에 의문을 품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서양 문명의 경계 또는 바깥에 있었던 역사적 인물 14명의 삶과 생각을 바탕으로 이 개념의 탄생과 확산 과정을 추적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역사』를 쓴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부터 고대 그리스를 단일 집단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을 ‘별개의 족보를 지닌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기술했다. 게다가 그 자신이 대륙을 넘나드는 이민자이자 정치적 난민인 헤로도투스는 ‘친절과 악의, 배타주의와 환대를 지닌 사람’이 아시아와 유럽 대륙 모두에 있다고 기술했다.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 충돌 같은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를 그는 인종적으로 단일하지 않은 건 물론 문화적으로도 끊임없이 서아시아 등 외부와 교류하고 영향을 받은 개방 세계라고 규정했다. 언어는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인에게서 왔고 상업과 화폐는 리디아인으로부터 배운 것이고 문자와 글짓기, 놀이와 여가활동은 페니키아인에게 배운 것이라고 밝혔다. 아나톨리아는 지금 튀르키예이며, 페니키아는 현재 레바논‧시리아와 이스라엘 북부에 해당한다. 또 신들에 대한 지식과 종교 의례, 역법, 천문, 점복은 이집트에서 전해졌다고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는 한마디로 혼종성의 세계였으며, 순수하게 그리스적인 것은 없었다.
고대 로마는 혼종성에서 한술 더 떴다. 문화적‧인종적으로 순수성 따위에는 무관심한 거대한 용광로의 세계였다. 고대 지중해와 서아시아의 문명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은 자신들이 그리스를 계승한 게 아니라 정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신이 로마의 신과 거의 일치하지만 이는 그리스만의 영향은 아니라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지중해‧서아시아의 공통 문화가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
예로 사랑의 여신을 그리스에선 아프로디테, 로마의 라틴인은 베누스(비너스), 페니키아인은 아스타르트, 메소포타미아에선 이슈타르로 각각 불렀다. 개방적인 로마인은 이집트의 이시스, 페르시아의 미트라, 프리기아의 키벨레 등 다양한 여신 숭배를 받아들였다.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은 제국의 교역로이자 문화의 고속도로였으며 혼종의 장이었다. 로마 황제 중에는 이탈리아 반도뿐 아니라 이베리아, 리비아, 아랍, 시리아, 발칸반도 출신도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서양에선 고대 그리스-로마를 문명적 기원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일까. 지은이는 인본주의 또는 인문주의와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회고주의와 의식적인 모방이 특징인 르네상스 시대를 지목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누렸던 여성 시인 툴리아 다라고나는 고대 로마를 즐겨 작품 배경으로 삼으면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논쟁을 작품에 녹였다.
하지만 아랍의 최초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알킨디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그리스의 유산은 이슬람이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번역 등을 통해 이슬람 세계도 이 유산을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다.

주목할 만한 인물로 18세기 후반 북미 매사추세츠에서 라틴어 문법과 음률 실력과 구약성서 등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시집을 출간했던 열여덟 살의 아프리카인 노예 여성 필리스 휘틀리가 있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7~8세 때 납치돼 필리스호라는 배를 타고 미국에 와서 휘틀리라는 주인 소유의 노예가 됐지만 독학으로 최고의 교양을 습득했다. 존재만으로도 그는 ‘생물학적 혈통에 바탕을 두고 인종적 위계를 강조한 서양 문명이라는 틀’에 통렬한 일격을 가했다.
개방성과 다양성이 서양 문명을 만들었다는 지은이의 통찰은 최근 고립주의와 개방 반대를 외치는 자국우선주의 정치세력의 인종주의적 본질을 더욱 잘 꿰뚫어 보게 해준다. 원제 The West. 책의 부제는 ‘A New History in Fourteen Lives’와 ‘A New History of an Old Idea’의 두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