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추석 연휴, 응급환자는 대통령실로

2024-09-03

대한의사협회가 의사회원들에게 보낸 추석 연휴 진료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이번 추석에는 회원 여러분 스스로의 건강과 가정의 안녕을 먼저 지키시기 바란다.” 히포크라테스가 들었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안내문이다. 더 고약한 것은 국민들에게 드리는 그 다음 문장이다. “추석 기간 응급 진료 이용은 정부 기관 또는 대통령실로 연락하기 바란다.”

아픈 환자 보고 대통령실로 연락하라는 것은 물론 은유다. 의료정책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이처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의협의 감정을 자극한 원인은 대부분 정부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해묵은 개혁과제이자 풀어야 할 숙제다. 역대 정부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의료시스템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대로 뜻을 이룬 정부는 없다. 그만큼 첨예한 이슈라는 뜻이다.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면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몇차례 실패가 주는 교훈도 바로 대안을 모색하라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역대 정부가 실패한 이 길을 추호의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섰다. 지난 정부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반성, 성찰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플랜 B, C라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협과 정부 갈등 7개월을 거치면서 지켜본 결과 정부는 대안이 없는 눈치다. 오롯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정책과 전략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6개월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는 어느 국무위원의 발언은 정부가 이 문제를 얼마나 단선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시간 싸움으로 순치 시키고도 발언이 갖는 부정적 함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러니 의협이 정부안을 수용 할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의협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기득권을 지키려 나서는 볼썽 사나운 모습 어디에도 최고 지성인의 품격과 품위를 찾기 힘들다. 의협은 의료서비스 개선이라는 정부의 큰 뜻을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100% 동의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와 타협과 협상을 통해 상호 이해를 조정하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협량(狹量)의 모습을 경계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의협은 정부를 굴복시키겠다는 전의만 앞세웠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고래가 싸우면 새우의 등이 터지는 법이다. 의협과 정부간의 대립과 갈등이 끝 간데 없이 이어지면서 애꿎은 국민만 피해를 본다. 대학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곳이 응급실이다. 전국 병원의 응급실이 고사직전이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이후 인력 부족 문제로 24시간 응급실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더이상 의사를 구할 수 없어 응급실 폐쇄를 고민하는 병원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 충남대, 건국대 충주, 경기도 아주대병원이 응급실 단축에 들어갔고 서울 이대목동병원도 전문의 부족으로 주 2일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한다. 강원대병원은 응급실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정부는 다른 얘기를 한다. “응급실 상황이 쉽지는 않지만 붕괴될 정도는 아니다.” 붕괴의 기준이 무엇인지 새삼 가늠해 본다. 완전히 해체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이 분석은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한 명의 의사가 지키는 응급실을 기능적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이미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병원이 허다하다. 의사들은 의료 붕괴가 일어날 것이고 수습이 불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막판에 가면 정부가 의대 정원을 취소 할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지금은 응급실 위기가 발등의 불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의료체계를 근원부터 압박하는 새로운 위협 요인도 등장했다. 미국이 한국 의사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의사 중 미국 의사 시험에 합격하면 종전 보다 완화된 조건으로 의사자격증을 발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 테네시주는 자국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마쳤거나 5년 이상의 임상경험이 있는 의사들이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하지 않아도 일정 요건을 갖춘 테네시주 내 병원에서 2년 동안 일하면 완전한 의사면허(full, unrestricted licensure)를 발급해준다. 일리노이주도 테네시주와 비슷한 법을 제정했다. 그 외 버지니아주, 플로리다주, 아리조나주, 위스콘신주에서도 비슷한 제도로 한국 의사를 유혹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한국의 서울대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별도의 시험 없이 의사로 활동할 수 있다.

의료 체계가 붕괴되고 전문의의 대거 이탈 우려가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대형병원도 경영난으로 적자에 허덕이자 의사와 간호사, 구조 조정을 시작했다. 진짜 문닫는 병원이 나올 수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정부도 의협도 여전히 타협과 협상의 미덕을 내세우는 흐름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백기항복을 기대하는 눈치다. 의료가 정치의 공간으로 이끌려왔기 때문이다. 서로 한발씩 물러나라는 얘기는 진부하다. 그러나 그 진부함 속에 공동체의 희망과 비전이 숨어 있다. 국민이 진정 원하는 최고의 가치 역시 이 진부함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시간을 놓치면 백약이 무효다. 긴 추석연휴 중 타협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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