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1] 마닐라의 새벽, 다시 필리핀을 생각하다

2025-12-06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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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노루꼬리만큼 짧아가고 있는 12월 5일 필리핀에 한-아세안 포럼 참석차 왔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이맘 때 날씨는 참 좋다. 1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건기 특유의 선선한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바틱 긴팔을 꺼내 입게 만든다.

새벽 공기마저 온화하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닐라 베이(Manila Bay)의 어둠을 바라본다.

시차 때문일까, 종일 포럼에서 머리를 곧게 세우고 귀쫑깃하며 듣던 탓일까. 아니면 오랜 현직 시절 함께 일하던 인연들-엘리자벳 전 필리핀 대사, 그리고 아바드(Abad) 전 아세안사무국 ARF Unit 담당자-를 다시 만난 탓일지도 모른다.

특히 아바드, 1993년부터 15년간 아세안사무국 요직을 거쳐 10년 간 필리핀 전략개발연구원 소장을 지낸 그는 내가 아세안에서 일하던 시절 가장 성실하고 따뜻한 정책가였다.

그가 내게 친필 서명해 주었던 그의 책, ‘The Philippines in ASEANd.’ 나는 이번 포럼을 앞두고 그 책을 다시 정독했다. 아세안 각국이 왜 아세안에 들어왔고,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를 '아세안의 눈'으로 들여다보게 해준 소중한 책이다. 그가 지금 그 책의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나까지 설렜다.

마닐라 베이가 품은 오래된 장면들. 40년 넘은 아드미럴 호텔 그 창문 너머로 새벽 어둠을 뚫고 요트의 불빛이 반짝인다. 이 풍경은 나를 자연스레 '그때의 마닐라'로 데려간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마닐라에 왔을 때, 나는 마닐라 호텔에서 밤새워 회의 준비를 했다. '동아시아 협력에 관한 마닐라 선언'이 채택되는 순간을 지켜보았고, 당시 탄쉐 미얀마 장군과의 회담 준비를 맡아 긴박하게 움직였다.

그 새벽도 지금처럼 어두웠다. 마닐라 베이 위에 아침이 열리기 직전의 저 고요한 어둠.

2007년 세부 한-아세안 정상회의도 떠오른다. 당시 외교부 동남아 과장이던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왔고, 회의 아침 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관께서 묻습니다. 노 대통령의 마지막 아세안정상회의인데, 아세안에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 없겠습니까?”

나는 10여 년간 아세안의 요청받아왔던 '아세안 무역진흥센터' 아이디어를 건의했고, 대통령은 이를 회의장에서 직접 제안했다. 그 결정은 2009년 '한-아세안센터'로 탄생했고, 지금은 협력의 대표 플랫폼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아세안 50주년. 아세안 대사로서 문재인 대통령을 마닐라 회의에 모시고 왔던 그 해.

이렇게 나는 직업 외교관으로서 마닐라에 세 번, 양자 방문은 셀 수 없이 왔다. 은퇴 후에도 UN ESCAP 자문으로 두 번, 이번이 세 번째다.

여러 번 왔지만, 이번처럼 마음이 놓여 마닐라베이의 석양과 여명을 여유롭게 바라본 적은 없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 다시 묻는 질문. 필리핀을 생각한다.

1960년대만 해도 일본 다음의 경제 강국이었다. 그들이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다. 그러던 나라가 '아시아의 병자(sick man of Asia)'라는 말을 듣는 시절을 지나,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

'VIP' -베트남(Vietnam), 인도네시아(Indonesia), 필리핀(Philippines). 아세안에서 인구 1억이 넘는 세 나라다.

내수 소비가 활발한 필리핀은 다시 성장의 활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마닐라의 현실은 복잡하다. 지금 마닐라 교통체증은 방콕, 자카르타보다도 심하다. 왜 이 시기만 되면 더 막히냐고 묻자, 현지 지인이 웃으며 말했다.

"9월부터 100일 동안 크리스마스 시즌이거든요. 행사 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 "돈이요? 해외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 가정부부부터 엔지니어까지... 다 가족에게 보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보내온 해외 송금은 자녀 교육과 한국의 미래 성장의 씨앗이 되었다. 필리핀 노동자들의 송금이 GDP의 10%를 차지하지만, 보다 생산적 쓰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식민지의 긴 그림자-스페인 330년, 미국 48년 그리고 일본 점령 3년-그리고 소수 엘리트의 기득권 구조, 만연한 부패, 단절된 사회 이동성. 그 모든 것이 필리핀의 발목을 잡았다.

호텔 밖 마닐라 베이에 호화 요트가 가득하다. 밤새 불을 밝히는 모습이 어쩌면 크리스마스 파티의 예고편인지도 모르겠다.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을 앞둔 필리핀에 기대를 걸어본다. 내년이면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다시 열린다.

필리핀은 내년에는 1987년, 1999년, 2007년, 2017년에 이어 다섯 번째 의장국이 된다. 이 나라에 주어진 기회는 결코 작지 않다. 경제적 활력, 젊은 인구, 글로벌 노동력,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번 도약하고 싶다"는 국민들의 열망.

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아세안 의장국이라는 무대 위에서 필리핀이 보여주길 바란다. 마닐라의 마지막 새벽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현재 방콕 소재 UNESCAP 시니어 컨설턴트이자 카카오스토리에 아세안 편지를 쓰고 있다.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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