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되던 해,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다. 변두리 시장통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도 선진교육을 들여와 학부모들이 빚내어 더 나은 학군으로 이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훈화하시던 그분은 높은 이상을 품은 열정적인 교육자셨다. 다만 그 이상이 때론 학교 현장에서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듯하다. 그분이 야심 차게 도입한 ‘구라파식 체력단련’이 특히 그러했다. 월요일에 조회를 마친 후 교무실로 심부름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이 밀크커피를 타 마시며 “구라파 좋아하시네” 쿡쿡 웃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체력단련의 방편으로 우린 매주 한 번, 한 학년 열두 반이 줄줄이 버스 타고 멀리 동서울 수영장까지 찾아가 교습을 받았다. 말이 교습이지 실질적으론 ‘물장구치고 맴맴’이었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조그맣고 까만 머리들이 꺅꺅 떠드는 통에 수영장의 지붕이 펑 날아갈 기세였다. 우린 매점에서 팔던 핫도그와 컵떡볶이가 맛났고, 수영교습 가는 날엔 오후수업이 없어 마냥 신났다.
그렇게 한 계절 동안 물에 뜨는 법과 물장구치는 법 정도를 터득했고, 이는 이제껏 내가 구현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생존 체육기법이 되어줬다.
수영교습과 함께 도입된 또 다른 체력단련 프로그램은 전교생이 날마다 등굣길에 운동장을 세 바퀴 달리는 것이었다. 국기에 경례부터 하고, 신발주머니와 가방을 교문 옆에 내려둔 채 준비운동을 실시한 후 달리기를 시작한다. 마무리 체조까지 끝낸 다음 실내화로 갈아 신고 건물에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정해진 순서였다.
학교 당국은 등교 시간에 6학년 주번 학생 열댓 명을 세워서 학생들의 숨소리를 일일이 확인하게 했다. 숨을 헉헉대지 않으면 뛰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운동장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어린이들이 지금보다 순진했다곤 해도 그런 식으로 전교생의 운동장 세 바퀴가 담보될 리 없었다. 국기를 향해 경례만 멋들어지게 하고서 적당히 뛰는 시늉 부리다 주번 코앞으로 다가가 헉헉거리면 그만이었다.
사실 주번은 귀찮아 신경도 안 썼지만 내 쪽에선 6학년 언니·오빠를 감쪽같이 속였단 생각에 짜릿했다. 그때 운동장에선 “주번, 메롱!” 하듯 태극기가 장난스레 펄럭였고, 저마다 그날의 달리기를 회피하고자 잔꾀 쓰던 아침 시간대부터 과제물을 서랍에 두고 온 걸 뒤늦게 확인하고 교실로 뛰어가던 나와 내 친구를 제외하면 교정이 텅 비어 있던 저녁 무렵까지 그렇게 계속 펄럭였다.
그해 겨울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야간대학원 다니며 박사 논문 쓰던 담임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동구권 붕괴의 상징성을 온전히 이해는 못했지만 허물어진 벽 앞에서 지휘자가 엎어질 듯 격정적으로 지휘하던 실황 중계를 인상 깊게 보았다.
음악이라 하면 ‘들장미 소녀 캔디’류의 만화 주제가만 떠올리던 꼬마였어도 귀에 닿는 선율이 대단히 아름답다 느꼈다. 후반부에 합창이 터져 나올 때는 작은 심장이 옷섶 안에서 쿵쾅거렸다. 지휘자의 이름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곡명만큼은 공책에 받아적었다.
아직 알파벳을 몰랐던 난, 선반 위의 음반들 가운데 숫자 ‘9’가 적힌 것들만 골라낸 후 그중 표지에 위인전기에서 본 베토벤 초상이 그려진 것을 찾아냈다. 마지막 악장을 연거푸 들으며 가사를 한글로 옮겨적어 달달 외웠고, 이듬해 학예회 때 친구들 앞에서 노래했다.
“플로이데 쉐네 궤테르 푼켄…” 이렇게. 지금도 자동반사적으로 이어 부를 수 있다. “…토스테르 아우 셀리지움.” 엉터리 발음으로 외웠던 노랫말 중 진짜 독일어 발음대로인 건 “알레 멘셴”뿐임은 한참 지나 알았다.
어린이날이라 하니 놀이동산도 선물상자도 아닌 저 장면들이 떠올랐다. 연주곡 ‘텅 빈 학교 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찾아 들었다. 어렸던 내게 스치고 스미어 기억할 만한 유년기를 만들어준 존재들에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