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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000660)가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중국 생산 시설에 대한 긴급 점검을 실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견제 수위를 끌어올리며 관세를 부과하고 주요 장비 공급을 제한하는 등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압박 속에 최대 시장과 생산 거점이 있는 중국도 챙겨야 하는 SK하이닉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사장)은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중국 우시를 찾아 두샤오강 우시시 당위원회 서기를 만났다. 우시는 다롄과 함께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주요 팹(반도체 생산시설)이 있는 곳이다. SK하이닉스의 연간 D램 총생산의 약 30%가 현재 우시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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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만남은 미국의 중국 견제가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뤄졌다. 미국은 올해 초부터 중국 제품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공언한 대로 결국 이달 4일 실행에 옮겼다. 중국 역시 엿새 뒤 일부 미국산 제품에 보복관세를 적용하면서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양국의 갈등이 빠르게 고조되고 있다.
곽 사장과 두 서기는 미중 갈등 속에서 우시 팹의 향후 운영 방안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시는 SK하이닉스의 주요 생산 거점이지만 제한 사항이 많다. 2019년 미국의 제재로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반입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우시 생산 제품 가운데 구형 반도체 비중이 높은 편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로 지정됐지만 생산 능력(캐파)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는 우시 팹의 선단 공정 전환을 추진하며 사용 기한을 최대한 연장한다는 기조를 밝혔다. 다만 선단 공정 일부에 필요한 EUV 공정은 한국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항공 수송을 활용하는 등 어려움도 있다. 우시 생산을 이어가려면 이러한 비효율성을 상쇄할 지역 정부의 지원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두 서기는 트럼프 정부의 대중 견제 속에 SK하이닉스가 투자·운영을 지속할 수 있는 정책 지원 등 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두 서기가 SK하이닉스를 적극적으로 챙기는 것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우시 팹에는 중국 인력 수천 명이 일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법인 ‘SK하이닉스 반도체 차이나(우시 팹)’의 지난해 상반기 매출과 순이익은 2조 6624억 원, 1194억 원이었다. 약 1656억 원의 순손실을 냈던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약 2850억 원을 더 벌어들이며 지역 경제에도 훈풍을 불어넣었다.
SK하이닉스 사정을 잘 아는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해 SK하이닉스가 우시 투자를 더 면밀히 검토하는 등 보수적인 기류가 강하다”며 “두 서기는 회사와 중국 사회가 공감대를 가져왔던 방향에 대한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양측 회동 이후 중국 팹 운영을 둘러싼 대외 여건은 더 나빠지는 모양새다. 미국은 반도체 제재망에 동맹국 기업까지 동참시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반도체 장비 기업에 더해 일본과 네덜란드 장비사에 대해서도 중국 내 장비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조치가 현실화하면 반도체 공정 전반에 보편화된 도쿄일렉트론(TEL), ASML의 장비의 유지보수가 어려워져 생산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이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중국에 앞서 부과한 10% 관세 외에 추가로 10% 관세를 더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양측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동시에 봐야 하는 SK하이닉스의 머릿속도 덩달아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 외에도 한국 반도체 업계를 향해서도 보조금 축소, 반도체 관세를 무기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우시·다롄 같은 주요 생산 거점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최대 반도체 시장이기도 해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미중 갈등 악화가 기업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현재 중국 생산 반도체는 대부분 한국으로 가고 있어 중국 관세가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