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건축미술기행
서울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위도가 거의 같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양극단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리스본에서 일생 대부분을 보낸 20세기 문학 거장 페르난두 페소아의 팬이 되거나 TV 예능으로 본 느리고 여유로운 삶의 모습에 반해 이곳을 찾는 한국인 방문객이 늘고 있다. 지난 9월에 대한항공의 서울-리스본 직항 노선이 개설되면서 이 도시는 한층 가까워졌다. 리스본에서 기차로 2시간 반(고속열차)에서 3시간 반(일반열차) 정도 걸리는 제2도시 포르투도 그렇다.
이 도시들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리스본에서 도시의 상징인 노랑색 푸니쿨라(케이블카에 가까운 전차)로 급경사 언덕을 오르내리고 원조 에그타르트를 맛보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포르투에서 도루 강 다리를 걸어 건너며 강 건너 붉은 지붕 집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면 어떻게 찍어도 아름다운 엽서 사진이 나온다. 두 도시 모두 바칼라우(염장대구) 같은 해산물 요리 맛이 기가 막히고 가격 대비 퀄리티가 탁월한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포르투에서는 달콤하고 향 깊은 포트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리스본에서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드러내는 호화로운 마누엘 양식 건축물을 찾고 포르투에서 마치 청화백자 같은 도자기 타일 아줄레주가 붙은 성당들을 찾아다니면 훨씬 풍요로운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리스본의 굴벤키안과 MAAT, 포르투의 세랄베스 같은 미술관들은 여행사 관광코스에는 없지만 세계 미술애호가들과 현지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곳이다. 중앙SUNDAY가 이들을 아우르는 리스본·포르투 건축미술기행으로 안내한다.
리스본 시내 중심가의 건축 풍경은 소박한 편이다. 포르투갈의 전성기인 15~16세기의 장려한 건축물은 1755년 대지진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고 그 후 도시가 재건될 때는 전성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몇 안 남은 건축물은 테주 강이 바다와 만나는 리스본 서부의 벨렝 지구에서 찾아야 한다. 백미는 단연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시내 중심가의 피게이라 광장에서 트램 15E번을 타고 30분 쯤 가면 된다. 바로 근처에 수도원에서 원조 에그타르트의 레시피를 전수 받은 유명한 베이커리 ‘파스테이스 드 벨렝’이 있다.
MAAT 옥상서 바라보는 테주강 풍경 압권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밝은 석회암으로 지어져 해를 받으면 눈부시게 빛나고 건축 양식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에만 있는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혼합, 항로 개척으로 얻은 부를 바탕으로 한 호화롭고 정교한 조각 장식들, 그 장식들의 바다 관련 모티프가 특징이다. 뾰족한 아치와 리브 볼트(뼈대가 보이는 궁륭)가 있는 높은 천장은 고딕 양식이고, 수평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는 르네상스 양식이다. 정교한 세부 조각 장식들은 밧줄·닻·혼천의 등 항해 관련 물품, 조개·산호 같은 해양생물, 선원들이 항해 중 목격했다고 주장한 기괴한 존재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양식의 명칭은 ‘행운왕’ 마누엘 1세에게서 따온 것이다. 왕은 우리 교과서에도 나오는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기념하기 위해 1501년에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지으라 명했다. 완공된 것은 꼬박 100년이 지난 1601년이었다.
이외에도 테주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요새이자 관문인 벨렝 탑 또한 16세기에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길고 고된 항해에서 살아 돌아온 선원들을 가장 먼저 환영해주는 ‘테주 강의 귀부인’으로 불린다. 또한 근처 강변에는 거대한 석조 ‘발견기념비’가 있는데 범선에 올라탄 역대 해상 탐험가들의 조각 군상이 탑과 결합된 형태다. 15세기 ‘항해 왕자’ 엔히크의 500주기를 기념해 1960년에 완공되었는데, 조각 군상의 맨 앞에 서있는 것이 바로 엔히크다.
발견기념비에서 강변 풍경을 즐기며 20분 쯤 걸으면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을 만나게 된다. 예전에 발전소였던 곳이다. 이어서 은백색 금속 타일로 뒤덮인 외벽이 곡선으로 물결치는 미래적 건축물을 만나게 되는데, 영국 건축가 아만다 레빗이 설계한 것이다. 이 두 건물이 2016년 개관한 현대미술관 ‘예술·건축·기술 박물관(MAAT)’를 구성한다. 발전소를 개조한 영국 런던의 유명 미술관 테이트모던을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미술관 전시도 볼만할 뿐만 아니라 언덕 형태의 은백색 건물 옥상을 걸어다니며 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바다 같은 테주 강과 길다랗고 붉은 현수교 ‘25 드 아브릴’(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 4월 25일을 의미)의 모습은 물론, 강 건너 까마득히 거대 예수상 ‘크리스투 헤이’를 볼 수 있다. MAAT는 아직 한국 여행사들은 잘 모르지만 미술 애호가들은 입을 모아 추천하는 리스본의 새로운 랜드마크다.
굴벤키안 미술관, 모네 등 유럽 명화 다수
그러나 리스본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은 따로 있다. 시내 신시가지에 있는 굴벤키안 미술관이다. 관광지가 몰려 있는 구시가지 바이샤에서 갈 경우 지하철 블루 라인(AZ)를 타고 15분만 가면 된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모더니즘 건축물 여러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는 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의 개인 컬렉션을 전시하는 본관과 동시대미술 전시가 열리는 분관인 ‘현대미술센터(CAM)’로 구성된다.
아르메니아계인 굴벤키안은 석유 사업으로 쌓은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1955년 타계할 때까지 고대 이집트·그리스 유물부터 19세기 유럽 인상주의 회화까지 6000여 점에 달하는 문화재와 미술 작품을 수집했다. 그 컬렉션을 바탕으로 1969년 문을 연 것이 이 미술관이다. 특히 이슬람 예술과 굴벤키안의 뿌리인 아르메니아 예술, 중국 채색 도자기, 유럽 로코코 가구 컬렉션이 인상적이다. 렘브란트·루벤스·터너·마네·모네·르누아르 등 유럽 거장들의 회화 컬렉션도 볼 만하다.
분관인 CAM(1983년 개관)에서는 동시대미술 전시가 열리는 가운데 지하의 ‘열린 수장고’에서 20세기 전반 포르투갈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문학 거장 페소아의 책 표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의 사후 초상화가 이곳에 있다.
한편 1755년 대지진 이후에 재건된 시내 중심가에도 이전 시대 건축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붕 없는 카르무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카르무 수녀원이다. 14세기 말에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한때 리스본에서 가장 큰 성당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지진으로 지붕이 무너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붕 없이 벽과 아치만 남은 모습이 특히 밤에 보면 신비롭고 독특한 데다가 대지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 유적이기 때문에 관광 명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포르투갈의 역사를 압축한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성당의 삼면 벽과 아치 기둥에 프로젝팅되는 ‘리스본 언더 스타스’ 쇼가 열리기도 했다.
리스본 근교의 도시 신트라도 건축기행에 좋은 곳이다. 19세기에 포르투갈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페나 궁전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색채의 낭만주의 건축물이다. 또 20세기 초에 부유한 사업가의 별장으로 지어진 헤갈레이아는 건축주의 신비주의 취향을 담아 여러 상징을 품은 기이한 정원이 일품이다.
☞여행정보=대한항공의 인천(서울)-리스본 직항 노선은 왕복 모두 매주 수·금·일요일 주 3회 운항된다. 포르투는 리스본에서 기차로 2시간 반(고속열차)에서 3시간 반(일반열차) 걸린다. 리스본의 산타 아폴로니아 역에서 출발해 포르투의 캄파냐 역에서 내려 무료 환승해서 시내 중심부의 상 벤투 역까지 가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