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작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작지 않다. 육지 중심의 사고에 갇혀서 생긴 오해일 뿐이다. 서해의 백령도에서 동해의 울릉도까지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여객선과 버스, 기차, 다시 여객선으로 환승 이동하니 700여㎞ 거리에 꼬박 22시간이 걸렸다. 해양 영토를 포함하면 우리 영토는 결코 작지 않다. 영해와 배타적경제수역, 대륙붕까지 포함하는 해양 영토는 육상 영토보다 4.4배나 크다. 이제 육지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머릿속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바다의 헌법 격인 유엔 해양법 협약 121조 3항은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지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섬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중요한 어장이자 지하자원의 보고인 배타적경제수역과 대륙붕의 면적이 줄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해양 영토가 중요한 것은 자원들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 우리 국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섬사람들이 민병대처럼 해양 영토를 지키고 있다. 섬사람들 덕에 우리는 더 넓은 해양 영토를 가질 수 있다. 군대가 해야 할 일을 섬 주민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여객선 공영제 등 섬 주민 정주여건 개선에 힘써야 할 이유다. 인구가 적다고 섬에 지원하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섬 주민들이 없으면 해양 영토도 없다.
사람 사는 섬엔 걷기 좋은 길 있어
세금 들여 만들어놨는데 개점휴업
섬길 100개 선정 국민들에 소개
이번 겨울엔 남쪽 섬으로 가시라
수도권 사람들은 강추위가 몰려오면 온 나라가 춥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울이 영하 10도일 때 남쪽 섬들은 영상이다. 남쪽 바다의 섬에는 노지 배추와 시금치가 자라고 그 연약한 상추마저 푸릇푸릇하다.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섬으로 가시라. 대부분의 사람 사는 섬에는 걷기 좋은 트레일이 있다. 하지만 어느 섬에 어떤 길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일부 유명 섬의 트레일을 제외하고는 늘 개점휴업 상태다. 우리 세금으로 만든 길들이 방치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단법인 섬연구소에서 섬길을 되살리고 섬들을 활성화하기 위해 ‘백섬백길’ 사이트(100seom.com)를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걷기 좋은 섬길 100개를 선정해 길마다 코스를 부여하고 ‘백섬백길’이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통합했다. 섬연구소에서 10여년 동안 회원들과 걷고 조사한 지리 정보는 물론 섬의 역사와 문화, 편의시설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 만들었지만 한국관광공사나 지자체들이 섬 관광 활성화에 적극 활용하기 바란다. 백섬백길 중 겨울에 걷기 좋은 남쪽 섬길 5개를 소개한다.
5코스 통영 추도 숲길. 추도는 난개발의 바람을 비켜가 마을도 자연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섬 중 하나다. 무엇보다 원시림이 온전히 남아 있어 숲속에 들면 섬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해안 둘레길은 덤이다. 7코스 통영 대매물도 해품길. 남태평양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한때 한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은 섬 수위에 꼽히던 소매물도의 형제섬이지만 동생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소매물도의 가장 멋진 풍광을 조망하기 좋은 섬은 실상 대매물도다.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인다. 22코스 여수 금오도 비렁길.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섬 트레일이다. 특히 겨울에 걷기 좋다. 다른 계절에 비해 한적하기 때문이다. 비렁은 벼랑, 절벽의 여수 말이다. 절벽 위를 걸으며 바라보는 바다는 한없이 평안하다. 절벽 끝에서 얻어지는 평화와 안식이라니! 삶의 절벽에 서본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위로의 길이 또 있을까.
29코스 완도 소안도 대봉산 둘레길. 소안도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 같은 섬이다. 면 단위의 작은 섬이지만 건국훈장 수상자 20명, 독립운동가 89명을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다. 1920년대 소안도 관련 신문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명에 달했다. 감옥에 가는 주민들이 생기면 남은 사람들도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주는 섬이다. 47코스 신안 암태도 모실길. 신안의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항일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소작쟁의로 유명하지만 섬이 가진 저항의 역사는 더욱 깊다.
조선 태종 8년(1408년) 2월, 소금 굽는 암태도 주민 김나진과 갈금 등 20여명이 왜구 해적선 9척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불과 20여명의 섬 주민이 해적 수백명과 싸워 승리했다. 치열한 저항의 역사가 깃든 암태도를 걸어보라. 섬과 해양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