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비트코인 출범 당시 ‘금융 해방’을 외치던 가상화폐가, 이제는 미국 정치권의 사리사욕과 이해충돌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자금세탁, 사기, 금융범죄에 이어 정경 유착까지 더해지며, 미국 내에서 가상화폐는 이제 궁극의 ‘늪처럼 썩은 자산(swamp asset)’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가 비판하고 나섰다. 이러한 유착은, 당초 가상화폐가 설파하던 ‘기술을 통한 금융 해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매
최근 6개월간, 미국 정가에서 가상화폐는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장관급 고위 인사들이 디지털 자산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규제기관은 가상화폐 지지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에더해,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들은 전 세계를 돌며 자신들의 코인을 홍보 중이다. 트럼프의 밈(Meme) 코인에 투자하면,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가 보장된다. 트럼프 일가의 가상화폐 자산은 수 십억 달러(수 조 원) 규모에 달한다. 한 워싱턴 소식통은 “현 트럼프 가문의 재산에서 가상화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현대 미국 정치사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재임 기간만큼 이해충돌이 빠르게 증폭된 사례는 없다. 이보다 더한 '사익 추구'는 이제 백악관이 아닌 가상화폐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공화당에 친화적인 가상화폐 업체들은 수억 달러(수 천억 원)를 들여 우호적 입법자들을 지원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가상화폐 업계의 정치적 기부금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가상화폐의 탄생 배경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2009년 비트코인이 등장했을 때, 이는 유토피아적이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기술로 환영받았다. 초기 가상화폐 지지자들은 “금융의 민주화”와 “정부의 압수·인플레이션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다.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기술을 통한 해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은 15년이 지난 지금, 모두 잊혔다. 가상화폐는 대규모 사기, 자금세탁, 금융범죄의 온상이 됐을 뿐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의 유착에 대한 상징이 됐다. 특히 미국 행정부와 가상화폐 업계와의 관계는, 월스트리트의 로비보다도 더욱 불투명하다.
반면, 유럽연합, 일본, 싱가포르 등은 가상화폐에 대한 명확한 규제를 마련, 안정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가상화폐가 통화 불안정과 정부의 자산 압류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술 측면에서도 가상화폐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투기성 요소는 여전하지만, 전통 금융 및 기술 회사들이 점점 더 진지하게 가상화폐를 수용하고 있다. 미국 국채, 원자재, 사모대출, 금 등 실물자산의 블록체인 토큰화가 지난 18개월 동안 거의 세 배 증가했다.
블랙록, 프랭클린 템플턴 같은 전통 자산운용사들도 토큰화된 머니마켓펀드(MMF)를 발행하고 있다. 가상화폐 기업들은 금 등에 연동된 토큰을 제공 중이다.
가장 유망한 활용처는 결제 분야다. 일부 기업들은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지난 한 달 사이,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결제와 정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는 101개국에서 스테이블코인 기반 금융계좌를 출시했다. 스트라이프는 올해 '브리지'라는 스테이블코인 플랫폼도 인수했다. 3년 전 디엠(Diem) 프로젝트를 중단했던 메타조차 다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가상화폐 업계 스스로가 날려버릴 위험도 크다. 가상화폐 업계는 바이든 정권하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게리 겐슬러 위원장은 가상화폐를 부정적으로 보고, 주요 기업들을 각종 소송에 얽어맸다. 은행들도 가상화폐 기업과의 거래를 꺼렸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기피 대상이었다. 법원을 통한 규제 해석은 비효율적이었고, 불공정한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이런 규제 흐름이 반대로 급변했다. 많은 소송들이 철회됐다.
결과적으로 미국 내 가상화폐 산업은 스스로를 구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금융 시스템에 위험이 전이되지 않도록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정계가 선거자금의 영향력에 눌려 규제를 포기한다면, 그 후폭풍은 심각할 것이다. 실제로 2023년에 붕괴한 실버게이트, 시그니처, 실리콘밸리 은행 모두 가상화폐 관련 자금의 급격한 유출로 위험에 처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처럼 규제받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 없이는, 가상화폐 업계가 워싱턴과의 거래로 얻은 단기 이익이 결국 독이 될 것이다. 트럼프 일가의 가상화폐 투자로 인한 명백한 이해충돌에 대해 업계는 침묵하고 있다.
가상화폐의 법적 지위와 규제를 명확히 할 입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적 이익과 공공 정책이 뒤섞이면서 입법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5월 8일 상원에서 진행된 가상화폐 법안 표결은 민주당 의원들과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지지를 철회하며 무산됐다.
어떤 산업도 한 정당에 지나치게 얽히면, 정치 지형 변화에 자유롭지 못하다. 트럼프를 구세주로 떠받들며 ‘늪처럼 썩은 자산’이 된 가상화폐 산업은 한쪽 진영을 택했다. 이로 인해 정책 논의 테이블에는 자리 잡았지만, 그 명성과 운명은 정치 후원자에 종속되게 됐다. 트럼프에게는 이익이 컸지만, 궁극적으로 이 거래의 수혜자는 그들만일 것이다.
권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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